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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Aug 24. 2018

베르타 벤츠, 자동차를 달리게 한 여자

세계 최초의 장거리 드라이버

2018년 글로벌 자동차 시장 규모는 약 9327만 대. 돈으로는 얼마일까. 대당 3천만 원 씩만 곱해도, 약 2798 조. 거기에 각종 부품/서비스 규모까지 생각하면, 수학을 놓은 지 10년이 넘은 나는 지금 연산이 좀 힘겹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그걸 시작한 게 한 여자라면 믿을 수 있을까?


최초의 자동차가 만들어지고도 2년. 자동차는 아직도 창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몇 번의 시연은 있었지만, 말 없는 마차를 처음 본 사람들은 기겁했고 급기야는 악마에 씌었다며 손가락질했다. 자동차 발명가는 하필 또 소심했다. 완벽에 완벽을 가하는 성미는 상황을 더 꼬았다. 역시 자동 마차는 말이 안 되는 것일까? 생각, 또 생각.


그 꼴을 보다 못한 한 사람이 발명가 몰래 차를 몰고 나선다. 책상 위엔 쪽지 한 장을 두고.


“애들이랑 친정 좀 다녀올게.”


1888년 8월 5일, 그렇게 세계 최초의 장거리 드라이빙이 시작된 것이다.


The Benz Patent-Motorwagen


2 마력 엔진. 최대 시속 16km. 4.5L 기름통. 2단 변속기. 만하임에서 포츠하임까지, 약 106km(66mi). 13살, 15살 아들과 함께 괴상한 마차를 모는 한 부인. 그들을 보며 신기해하는 온갖 사람들. 이것이 아마 그날의 풍경이었을 테다. 베르타 벤츠는 보여주고 싶었다. 싸이코 박사만 자동차를 몰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길 바랐다. 평범한 여자도, 더 쉽게 더 멀리 갈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을. 그래서 직접 차를 몰았다. 그녀는 훌륭한 마케터이기도 했다.


길은 쉽지 않았다. 돌길의 충격은 차체에 고스란히 전해졌고, 언덕을 넘기에 2단 기어는 역부족이었다. 엔진은 쉽게 과열되었고, 나무 브레이크는 곧 닳기 시작했다. 점화기의 전선들은 자꾸 꼬였고, 연료 노즐이 막혔다. 이 모든 난국 앞에 베르타 벤츠가 어떡해, 어떡해 발만 동동 굴렀을까. 문제 해결은 동네 남자들이나 아들들이 했을까?


베르타 벤츠는 또한 세계 최초의 자동차 테크니션이었다.


베르타 벤츠와 칼 벤츠


연료 노즐이 막히면 머리핀으로 뚫었고, 가터벨트로 점화 전선에 절연 처리를 했다. 구두공을 불러 브레이크에 가죽을 덧대 최초의 브레이크 패드를 만들었고, 엔진이 과열돼 멈출 때마다 아들들과 물을 길어와 식혔다. 기름이 모두 떨어지자 그녀는 약국에서 리그로인(벤젠)을 사서 넣었다. 세계 최초 자동차가 다니는 길엔 당연히 주유소가 없었다. 당시엔 휘발유를 비롯한 모든 연료를 화학자만 팔 수 있었고, 베르타 벤츠가 들린 비슬로흐의 약국은 세계 최초의 주유소가 되었다.


베르타 벤츠 메모리얼 루트. 당시 베르타 벤츠가 지났던 길을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기념하고 있다.


세계 최초가 달리는 길은 모든 것이 최초였다. 최초의 로드 트립, 최초의 주행 시험, 최초의 브레이크 패드, 브레이크 라이닝. 자동차의 역사에 온갖 최초를 만들며 베르타 벤츠는 저물녘에 친정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기가 죽어지내던 남편에게 보란 듯이 전보를 부친다. 드라이빙 성공. 사흘 후 베르타 벤츠는 역시 모터바겐을 끌고 만하임으로 되돌아갔다. 왕복 195km (121mi). 베르타가 돌아온 날, 칼 벤츠의 표정이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프랑스인 에밀로져와 계약해, 모터바겐의 생산 판매를 개시했다. 자동차 산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올 8월은 이 주행의 130 주년이 되는 달이었는데, 그날의 일을 벤츠는 이렇게 기념한다.


She drove more than a car,
she drove an industry.
Mercedes Benz, The First Driver


멋진 영상. 하지만 왜 이렇게 정적일까. 왜 이렇게 자신 없는, ‘여자’의 얼굴일까. 이 사람은 세계 최초의 메카닉인데. 소심한 개발자를 한방 먹인 박력 넘치는 드라이버인데. 덜컹대는 차체 진동과 시끄러운 모터 소음은,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간 걸까. 최초의 자동차, 최초의 드라이버, 최초의 메카닉이란 자산을 모두 갖고도 벤츠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밖에 못 푸는 걸까. 자동차의 시작에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사우디에 여성 운전이 허락된 첫 해에 얼마나 더 멋지게 전달할 수 있었을까.


때로는 현상 자체가 한계가 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 여자 메카닉은 별로 없다는 현상 자체가, 여자는 메카닉을 잘할 수 없단 한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현상을 뛰어넘은 사건들은 소개만으로도 강력한 힘을 갖는다. 한계를 부수고, 새로운 길을 연다. 세상을 남자 혼자 굴려왔을 리가 없다. 자동차를 연구소 밖으로 나오게 한 건 여자였다. 이 간단한 사실 하나가 얼마나 강력한지. 이 한 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호흡을 가빠지게 하는지.


1933년, 베르타 벤츠


베르타 벤츠는 1944년에, 그러니까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아마, 할머니가 되어서도 자동차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겠지. 이 놀랍고 멋진 사람을 나는 왜 여태 몰랐을까. 세상엔 아직도 내가 모르는 멋진 여자들이 너무 많다. 또 어떤 언니들이 날 놀라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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