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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Jun 24. 2018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 것들

1종 보통 면허 취득기

“진짜 죽을 수도 있어”

그야 그럴 수 있다. 

30미터 밖에 내팽개쳐진 팔. 짓이겨진 두 다리. 열악한 공장에서 발생한 사고가 아니다. 호러 영화의 한 장면도 아니다. 이것은 평범한 도로에서 일어난 일이다. 교차로에서, 코너길에서, 소방관인 남자친구가 교통사고 현장에 도착해서 흔히 보는 풍경이다. 그런 그가, 시뮬레이션으로 운전면허를 따겠다는 내 말에 내 목숨부터 걱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죽지 않고 면허를 딸 수 있을까. 

또래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운전면허를 딸 때, 나는 왠지 차를 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면허에 안달내는 게 꼭 어른 티를 내고 싶은 어리광처럼 보였다. 나는 말하자면, 어른이 되기 싫은 축이었다. 그래서 성인이 되었다는 증표들에 큰 흥미가 없었다. 술을 마실 수 있다, 담배를 살 수 있다, 영화관에서 19금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런 기쁨은 사소했다. 그에 비해, 슬픔은 컸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성인이라는, 그만한 책임이 생겼다는. 적어도 내게는.

다행히 성인이 된 이후로도 내게는 몇 년간 학생 시절이 더 이어졌으므로 면허증 때문에 불편할 일은 거의 없었다. 취직을 하고 나서는 자율주행차의 핑계를 댔다. 10년만 더 기다리면 구글이 자율주행차 완벽하게 만들 것 같아서 조금 더 기다리려구요. 광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대기엔 적절한 핑계 같았다.  

그런데 나이 서른을 넘기고 보니 면허가 없다는 게 약간 쑥스러운 일이었다. 누가 봐도 30대인 내가, 예순 직전의 엄마가 모는 차를 타야 한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도 교대 운전을 해줄 수 없다. 남자친구가 밤새 출동에 시달린 날에도, 나는 운전을 못한다. 슬슬 면허를 딸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운전 학원은 비싸고, 하나같이 먼 탓에 직장을 다니면서 등록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실내 운전 연습장을 택했던 것이다.  

실내 운전 연습장. 1종 대형부터 2종 자동까지, 실제 운전석을 똑같이 가져온 모형차를 타고 3D 시뮬레이션 화면으로 운전 연습을 한다. 실제 주행 감각은 면허 시험장에서 익힌다. 전문 학원보다 훨씬 저렴하고, 연습 시간이 자유롭다. 대신, 취득에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제법 합격 후기들이 많았다. 대개는 2종 자동이었지만, 1종 보통 합격 후기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6년차 소방관의 온갖 만류에도 나는 대뜸 실내 연습장의 합격 보장 코스를 등록했다. 

“어... 1종 보통 따시려구요? 뭐, 꼭 해야 되는 이유가 있어요?”

여자가 1종 보통을 딴다고 하면 다들 묻는다. ‘아니, 왜? 사회복지사 준비하세요? 아니라구요? 그럼 2종 하세요. 왜 일부러 고생을 해요.’ 인터넷의 수많은 ‘여자 1종 보통 합격 후기’의 주인공들처럼, 나도 저 이야기를 내도록 들었다. 내 참, 자동차가 오토로 나온 게 뭐 몇 년이나 됐다고. 우리 엄마 때는 다 스틱이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어. 게다가 차를 배운다면 역시 스틱이었다. 나도 신세기 사이버 포뮬러 보면서 자랐고, 속도에 따라 기어를 바꿔 차를 달래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남자아이들은 반대로 ‘남자라면 1종 보통이지’라는 편견 속에 한두 번 떨어질 때마다 ‘남성성 붕괴’라는 대 시련을 겪는 모양이지만, 일단 나는 내 눈 앞의 운전 선생이 성가셨다. “그냥요, 스틱 차 몰고 싶어서요.”라고 간단히 대답하자, 돌아온 그의 답.

“그러면, 가능성이 있는지 좀 볼게요.”

1종 보통 면허 취득이, 그렇게나 나의 잠재력이 필요한 일인가? 그의 설명은 이랬다. 1종 보통 장내기능시험에서 가장 어려운 건 경사로, T자, 가속 구간이다. (솔직히, 이게 전부다.) 그렇기에 직각 코너 핸들링, 경사로, 가속을 어떻게 하는지 보면 합격 가능성을 알 수 있다는 거였다.

실내 연습장 화면, 대기실 만큼은 똑같다


그는 나를 운전석으로 데려가, 클러치, 브레이크, 엑셀의 위치를 알려주고 시동 켜는 법을 알려줬다. 경사로 구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한 번에 밟아 정지. 멈추는 것은 쉬웠다. 문제는 다시 움직이는 것인데,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클러치를 살짝 떼다가 차가 덜덜거리면 클러치에 얹은 발을 그대로 두고, 브레이크의 발을 잽싸게 엑셀로 옮겨 살짝 밟아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능숙하게 페달을 다뤘다. 내 차례가 이어졌다. 시동이 꺼졌다. 클러치를 반만 뗀 상태를 ‘반클러치’라고 하는데, 그때 브레이크를 떼면 시동이 꺼졌다. 연속 3번 시동을 꺼뜨리자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다시 시범을 보였다. 반클러치 상태에서 클러치에 가하는 압력과 반비례하여 엑셀을 살짝만 밟을 줄 아는 그가, 무슨 사이버 트론에서 잘못 내려온 옵티머스 프라임의 후손처럼 느껴졌다. 젠장. 그가 보는 앞에서 나는 시동을 한번 더 꺼뜨렸다. 

“정말 1종 하셔야겠어요?”

고작 1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클러치라는 것을 밟아 본 게 채 30분도 안 됐을 때였다. 그런데 그는 포기부터 시키려 한다. 그의 빠른 판단보다 더 단호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선생은 해볼 테면 해봐라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게 안 되는데 가속은 어떻게 하시려구요, 라면서 가속 구간을 가르쳐줬다. 

제한속도 표지판이 보이면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2단에 넣는다. 차의 꽁무니가 표지판을 다 빠져나오면, 클러치 뗀 상태에서 엑셀을 밟는다. 시속 20km가 넘을 때까지. 속도를 넘기면 바로 클러치 밟고 3단에 변속했다가, 브레이크 밟아 감속하고 2단으로 내리고 1단까지 쭉 내린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기어도 처음 만졌고 클러치도 처음 밟았다. 틀리는 게 당연했다. 시속 20km로 자전거는 타봤지만 차로는 처음이었다. 속도감이 완전히 다르다.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또 한숨소리가 들린다. 선생이 자리를 떠났다. 차라리 없는 게 편했다. 혼자서 연습하자 조금씩 감이 왔다. 화면만 보고도 기어봉을 다룰 수 있게 됐다. 조금 더 연습하자 가속 구간은 어렵지 않게 해내게 됐다. 뒤늦게 온 선생이 말했다. 

“희한하네. 경사보다 가속을 잘 하시네.”

봤지? 약간 승리한 기분으로 첫 한 시간이 끝났다.

다음날은 다른 선생이 나타났다. 그는 어제 배운 가속을 다시 시켰다. 당연히 틀렸다. 한번 더 해보라는데 또 틀렸다. 사소한 실수였다. 한 번은 20km를 넘기지 못했고, 한 번은 브레이크를 너무 세게 밟아 차가 섰다. 나로서는 어제 고작 20분 해본 건데 언제 무엇을 하면 되는지 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으쓱했다. 운전에 소질이 없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선생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2종 자동 해보실래요? 2종 자동 해봅시다.”

해보니 2종은 쉽긴 쉬웠다. 시동이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메리트였다. 페달 한 개 있고 없고 가 이렇게 다르다니. 자동 기어가 나왔을 때 세상에 광명 있었을지라. 

“어때요, 쉽죠?”

선생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어봤다. 

“네, 쉽네요.”

대답은 심드렁했다.

“2종 안 하실래요?”

“네.”


그의 기대를 때려 부수는 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진짜 시간 많이 걸릴 것 같다, 보니까 운전감이 없다, 선생은 거듭 나를 설득해보려 했다. 그럴수록 궁금해졌다. 나 지금 운전대 잡은 지 85분도 채 안됐는데, 뭐가 문제지? 이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나의 무능을 이렇게 쉽게 판단하는 거지?

다행인 건 내가 인생 경력 30년 차였다는 것이다. 차는 몰아본 적 없어도, 그간의 내 판단력과 경제력은 나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나는 1종 보통을 딸 소질이 있고, 그를 위해 지불할 돈도 있었다. 더군다나 85분이란 시간은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말지 판단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선생에게 스스로 결정할 테니, 연습하게 좀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 서부 면허시험장에서 장내기능시험을 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졌다. 2종 자동 응시자들도 많이 떨어졌다. 세상의 분위기는 운전면허를 한 번에 따지 못하면 천하의 머저리인 것 같지만, 그게 아니었다. 출발도 못하는 사람, 반도 못 가서 떨어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나는 주차를 하다 검지선을 밟고, 그 김에 아주 시동을 꺼뜨린 끝에 떨어졌다. 옛날 초등학교 농담의 통키 아빠가 된 것 같았다. 통키 아빠가 왜 죽었게? 금 밟아서.


서부면허시험장, 떨리는 순간


이제와 말하지만, 6년 차 소방관의 말은 옳았다. 솔직히 말해서 시뮬레이션 차와 실제 차가 같은 건 도로의 모습과 기어봉 정도였다. 클러치와 브레이크 느낌, 실제 차가 움직이는 속도감 및 핸들감, 그 두려움, 모든 게 달랐다. 실내 연습장의 선생은 내가 첫 시험에서 T자 주차까지 갔다는 거에 놀라워했다. 그의 태도에서 많은 걸 유추할 수 있었다. 따로 연습해 볼 수동 차가 있는 게 아니라면, 면허 시험장의 평일 시험 일정에 무한정 맞출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운전 학원에 등록을 해서 배우는 게 나았다. 

실내 연습장에서 환불을 받고 휴가를 냈다. 팀장님께 면허 따서 돌아오겠다고 출사표를 냈다. 새로 등록한 운전 전문 학원에는 선생’님’이 있었다. 이제야 나는 클러치를 밟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동력을 끊어준다는 건지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왜 내가 시동을 꺼트리는지, 반클러치를 어떻게 활용하면 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도로 주행의 몇 가지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팁도 배웠다. 사실, 운이 좋았다. 좋은 학원을 잘 찾아갔고, 마침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실내 연습장 첫날 그들의 으름장과 달리 학원 등록 3일 만에 나는 1종 보통 면허를 취득했다. 도로주행 때는 어려운 코스가 나와 언덕을 두 번이나 타야 했는데도, 시동을 꺼뜨리지 않았다. 거봐, 나 소질 있댔지. 1종 대형도 한번 따볼까, 손잡이를 잡고 트럭에 올라타는 건 너무 멋진 일이다. 그리고 나는 무능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 무능해질까.

나는 ‘오므라이스 잼잼’이라는 만화를 좋아한다. 음식 그림도 맛깔나지만 조경규 작가 특유의 삶의 태도가 더 좋다. 그의 가치관은 특히 자식 교육을 할 때 드러나는데, 최근 에피소드는 이랬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된 그의 자식은 아직 영어 알파벳을 쓸 줄 모른다. 사실 알파벳이야 붙잡아놓고 가르치면 이삼일 내로도 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하루에 네 글자씩 두 달 동안 아들과 알파벳을 천천히 외워나간다. 아이의 부담은 딱 하루 네 글자 정도다. 그리고 두 달 뒤 아이는 보이는 알파벳들을 곧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알파벳을 떼는가가 아니다. 시간을 들여 읽는 법을 배우고, 읽고 싶은 것을 읽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무능하게 만드는 건 결국 시간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우리를 병아리 감별사처럼 대한다. 돈 되는 애, 아닌 애. 재능 있는 애, 아닌 애. 그런데 소질은 암수로 나뉘지도 않고, 눈으로 척 본다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어, 수학, 과학, 미술 - 거의 모든 부분에서 아주 빨리 판단 당한다. 야, 너는 공부도 못하는 게 이거라도 잘 해야지. 혹은, 니가 무슨 음악을 해? 이런 식으로. 밀린 이자 독촉당하듯 결과를 채근받느라, 무언가 빨리 보여주지 못하면 더 빨리 포기 당한다. 그런 일을 너무 어려서부터 겪는다. 자기 자신을 부양할 수 없는 시기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한계부터 알고 어른이 된다. 운전면허를 딸 때도 마찬가지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운전면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면허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사실 쉬워서도 안된다. 당연히 떨어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실이 마치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처럼 스트레스받고 있었다. 왜 학원은 꼭 필요치 않은 사람들에게도 ‘단기 속성 취득’을 광고할까. 왜 면허를 빨리 따야 할까. 


첫 도로주행


운전을 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약속의 세계에 진입한다는 것이다. 빨간 불엔 멈춘다. 껴들 때는 깜빡이를 켠다. 단순하지만, 나와 너의 목숨을 함께 거는 약속. 심야 택시에 목숨을 맡기고 달릴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과속을 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낙관론자들이야. 과속은 반대편 차선에 ‘약속을 어긴 사람’이 없으리라는 믿음으로 하는 일이다. 사거리 신호에서 빨간 불을 어기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깜빡이를 안 켠 저 사람은 차선 변경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걸 마치 운전 잘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밤마다 나의 소방관은 출동을 나가는 것이다. 약속을 어긴 사람들을 구하러. 운전 참 더럽게 못하는 사람들을 구하러.

운전을 잘하는 건 드리프트 잘하고, 신호 잘 까고, 최대 속력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가고 싶은 곳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달릴 줄 안다고, 기어를 좀 능숙하게 다룬다고 깝치는 사람들이 선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운전은 약속이 전부인 일이니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는 사람들만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 결코 서두를 필요 없는 일임을 아는 사람들만이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아침에 퇴근한 소방관을 태우고 집에 왔다. 도로에 나간 건 오늘로 다섯 번째다. 소방관은 합류 지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이없는 사고들, 교차로의 비상식적 끼어들기에 대해 경고하다가 문득 한숨을 쉬었다.
 
“사실 너 같은 초보가 운전해도 위험하지 않아야 맞는 건데...”

우리는 빨리 따지 않아도 되는 면허를 빨리 따야 한다고 닦달하는 세상에서 차를 몬다. 지금 내 주머니엔 1종 보통 면허증이 있고 나는 살아서 이 글을 쓴다. 이게 내가 운전면허를 따며 배운 것들이다.





실내 운전 연습장 효율적으로 쓰는 팁 : 

1종 보통을 배우시는 경우라면, 2시간 정도만 등록해서 클러치, 브레이크, 기어 등을 같이 만져보면서 화면만 보며(기어봉 내려보지 않고) 변속하는 연습을 많이 해보세요. 그런 후에 운전 전문 학원에 가면 강사님들과의 소통이 훨씬 수월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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