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친구는 소방관이다. 그걸 밝히면 으레 '오~ 몸 좋아?' 하는 질문이 돌아온다. 미국 소방관들이나 몸짱 소방관달력을 떠올리는 모양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남자친구는 잘생겼다. 그런데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아무리 봐도 몸짱은 아니다. 몸이 짱 건강하긴 하다. 지방간, 혈압, 콜레스테롤 모두 없다. 달리기도 좀 하고, 힘도 좀 세다. 그래도 벗겨놓고 자랑할 몸은 아니다. 그냥 평범하다.
이건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남자친구는 소방관이다. 그러면 으레 '오~ 멋지다' 하는 반응이다. 이번엔 몸 말고 멘탈 쪽. 박봉을 감수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위기의 순간 어김없이 나타나는 슈퍼맨. 내 입으로 말하자니 쑥스럽지만 그는 착하다. 고릴라 같은 몸을 해갖고선 나보다 몇십 배는 섬세하다. 근데 나는 이처럼 욕 잘하는 사람을 본 적 없다. 그 앞에서 누가 새치기라도 하면, 안쓰러울 정도로 망신을 준다.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던데, 그걸 빼면 성스러움의 ㅅ자 하나 갖다 붙일 구석이 없다.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도, 답답한 상사 때문에 빡치는 것도, 보너스가 들어오면 시원하게 한턱 쏘는 것도, 똑같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이것은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어주는, 이런 이야기도 아니다.
세상은 특별한 사람들만 소방관이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소방관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영웅적인 것이 됐다. 낡은 장비, 부족한 인원, 열악한 근무환경. 그 모든 걸 감수하고 화염 속 어린아이를 구해내고, 멎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너무 놀라워서, 기적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남친과 술 마실 때 그가 덤덤히 들려주는 이야기를 나도 사랑한다. 그러나, 그가 영웅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무엇을 감수하지 않길 바란다. 가장 강한 사람들만 소방관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최근 타임라인에 소방관 이야기가 많이 올라왔다. 국가직 전환 문제나 소방관이 자비를 털어 손해배상금을 충당한다는 게 뉴스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런 헤드라인을 봤다. "말로만 불쌍한 소방관." 사람들이 소방관을 '말로만 불쌍하다'고 하지, 실제 하는 행동은 하나도 그렇지 않다는 거다. 의도엔 공감한다. 자기 다칠 거 생각 않고 현장에 뛰어든 사람에게 어쩜 손해 배상을 하라고 할까. 그리고 그런 부당한 요구에, 세상천지 어떤 조직이 자기 팀원의 책임으로 돌리며 돈을 내게 할까. 뒤늦게나마 이슈가 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자꾸 소방관 앞에 '불쌍하다'는 말이 붙는 걸까.
소방관과 비슷한 월급을 받으며, 비슷하게 업무가 험한 경찰관에겐 '불쌍한'이란 말이 잘 붙지 않는다. 고생한다고 하지, 불쌍하다고는 안 한다. 경찰은 권력이 있으니까. 나쁜 사람을 벌주고, 사회를 훈육하는 기관. 그러나 소방관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래서 힘이 없다. 심정지 환자를 싣고 달리는 앰뷸런스에 보복 운전을 하는 사람, 아파트 단지에선 사이렌을 꺼달라는 사람, 자기 차가 망가질까 5미터를 돌아서 소화 호스를 꽂으라는 사람. 거기 더해, 문을 따달라거나, 하수구에 빠진 핸드폰 찾아달라는 신고도 못 막아주는 윗사람들의 소심함. 다친 사람이 발생하면 고과가 깎이는 이상한 평가 시스템. 소방관에겐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이 없다. 함께 힘이 되어줘야 할 조직은 오히려 소방관 개인을 탓한다. 니가 참지 그랬냐. 소방관은 불쌍하지 않다. 이 모든 상황이, 소방관을 불쌍하게 만들 뿐이다.
흔히 소방관의 노고가 많으니 그들을 도와주자고 한다. 소방차 주차구역엔 차를 대지 말고, 바람처럼 달리는 앰뷸런스가 있으면 길을 터주자. 의도는 가상하나 도와주잔 말은 틀렸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만 하는 일이다. 그 행동이 누군가를 위한 거라면, 그건 불쌍한 소방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거다. 우리 모두 언제라도 119를 간절히 기다리게 될 수 있으니까. 정말 불쌍한 건 곤경에 처한 사람을 앞에 두고 자기 잇속이나 불편만 따지는 사람들이다.
소방관의 여자친구로 산다는 건 답답한 일이다. 가끔 이 사람들이 너무 바보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더 억울한 사람 많다고 참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도, 밥그릇 챙기는 것처럼 보일까 참고. 고생한 게 있어도, 티 낸다고 느껴질까 또 참고. 속 좁은 나는 소방관이 자기 일을 사랑하긴 힘들 거라 생각했다. 나는 매일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의심하니까. 하지만 나의 친구 소방관들은 하나같이 자기 일을 사랑했다. 그 일의 본질을 마음 깊이 아꼈다. 그러면서 그들은, 당황스러운 민원도 답답한 조직도 그저 묵묵히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오늘 하루도 그저 별탈 없기만을 빈다.
소방관을 영웅으로 다루거나, 불쌍한 사람으로 이야기하면 수당, 휴가, 복지혜택, 고과, 직장인으로서의 고민은 이야기할 수 없다. 영웅은 원래 희생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겁 많은 큰 언니도, 응석받이 남동생도 소방관이 된다. 내 옆의 평범한 사람들이 소방관이 된다. 특별히 정의로워서, 남들보다 용기가 곱절로 많아서 기적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래야 하니까, 자기는 소방관이니까 해내는 거다. 그래서 대단하고, 그래서 놀랍다. 가장 보통의 소방관도 매일매일 기적을 만들고 있으니까. 평범한 한 사람이 다른 평범한 한 사람을 구한다는, 평범한 기적.
나는 소방관이 불쌍하지 않다. 그러니까 부당한 건 따져 묻고, 바보 같은 민원인과는 드잡이도 하고, 자기 권리는 악착같이 챙겼으면 좋겠다. 자기 스스로를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도 나와 같이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니까. 출동이 너무 무섭지 않고, 출근은 좀 더 가벼웠으면 좋겠다. 내 하나뿐인 소방관이 자기 목숨을 내걸고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안전했으면 좋겠다. 그건 곧 우리 모두가 오늘도 안전했단 뜻이니까.
대한민국엔 소방관이 약 4만 명. 그럼 소방관의 가족들은 직계만 쳐도 20만 명. 애인도 4만 명. 친구들은 절친한 것만 세서 30만 명.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누구에게도 불쌍하지 않았으면. 영웅의 자리에 박제돼 공허한 칭찬만 듣지 않았으면. 내년 이맘때엔 부디 소방관을 쓰는 법이 좀 달라지기를. 그 누구도, 소방관을 불쌍하게 만들지 않기를, 소방관의 여자친구는 그저 빌어보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