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열심히 학교 생활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쳐있던 시기였다. 드디어(?) 취업시즌이 왔다.
남자 애들은 빠르면 여름방학 때부터 취업을 하나 둘 시작했다. 이미 취업이 확정된 그 친구들의 여유 있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난 마지막 학기까지 전공공부를 제대로 마치고 취업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중간고사가 끝나는 10월까지는 마음이 촉박하거나 불안하진 않았다.
여자 전공자들이 갈만한 회사가 별로 없다는 얘기를 흘려듣긴 했다. 하지만 그저 남들 얘기일 뿐,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을 줄 알았다.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학과 사무실에 찾아가서 취업의뢰 들어온 것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지나가다 슬쩍 게시판에 붙어있는 취업공고를 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살펴보고 조교와 상담한 건 처음이었다. 아…. 눈앞이 깜깜했다. 회사에서 여학생을 모집하는 분야 중에는 내가 배운 전공을 살릴만한 곳이 하나도, 정말 단 하나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예 전공과 관련 없는 구인공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나마 전공과 관련 있는 업무라고 할만한 것은 PCB 디자인 쪽과 핸드폰 서비스 센터에서 AS를 하는 엔지니어 정도였다. PCB(PRINTED CIRCUIT BOARD) 디자인은 설계된 회로를 기판에 구현하기 위해 PCB설계 툴을 가지고 디자인하는 일인데, 회로를 알아야 기판에 효율적으로 회로를 배치해서 디자인할 수 있으니 꼼꼼하고 차분한 여자 전공자를 선호한다. 또, 핸드폰 서비스 센터에서 서비스 업무가 아닌 실제 AS업무를 하는 일도 회로를 아는 전공자만이 AS업무를 할 수 있고, 직접 고객과 마주해야 하니 좀 더 살갑고 친밀한 여자 엔지니어를 우대한다. 두 분야 모두 전공 지식을 필요로 하고, 초봉은 낮지만 꾸준히 경력을 쌓았을 때는 얼마든지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어서 여자가 하기에 좋은 직업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이건 둘 다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가 설계한 회로를 가지고 기판만을 디자인하거나 AS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했고, 내가 선택한 전파통신분야의 전공필수 과목인 초고주파공학 수업을 매주 4~5시간 동안 수강하며 씨름하면서 느꼈다. 이 분야를 계속해보고 싶다, 이와 관련된 일을 하는 회사에 가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21~22살 동생들처럼 초봉 1200~1300만 원을 받으면서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취업하기에는 4년 늦은 시간이 아까웠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취업률이 선택에 큰 역할을 한 지금의 학교와 전공, 하지만 아무리 높은 취업률이라도 내가 원하는 곳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나 전공은 죄가 없다. 학과 사무실 게시판에 붙은 곳에 이력서를 쓴다면 분명 무난히 취업을 했을 것이다.(실제 학과 여자 동생들 몇 명은 그 분야로 취업을 했고, 꽤 오랫동안 꾸준히 잘 다니면서 좋은 연봉을 받고 복지혜택을 누렸다.) 단지 전공 공부가 좋아졌다고, 꼭 그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개발 업무를 하려고 고집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높은 취업률이 아무 소용없어진 건 전적으로 내 탓이다.
학과 사무실을 나왔다. 내가 하고 싶은 개발 업무 쪽으로 취업을 하려면 학교에 기대지 말고 직접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회사를 검색했다. 초고주파쟁이라면 누구나 아는 한 사이트에 들어가 구인공고를 낸 회사를 싹 다 뒤졌다. 문제는, 가고 싶은 분야를 뽑는 회사들이 대부분 4년 제졸업장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조건을 제외하면 이력서를 써 볼만한 회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4년 제졸의 자격조건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자기소개서를 정말 성심성의껏 썼다. 비록 2년 공부로 전공 지식수준은 부족하지만 누구보다 전공에 흥미가 있고 잘해보고 싶은 의지가 있다는 걸 강조했다.
20여 개 회사 목록을 정리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중소기업들뿐이라 딱히 우선순위 같은 것도 없었다. 한 번에 이력서를 보내면, 한 번에 연락이 안 왔을 때, 너무 낙담할 거 같아 하루에 두 개, 세 개씩만 이력서를 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서도 연락 오는 곳이 없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학교에 갈 때마다, 편입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같은 졸업반 동생들이 하나 둘 취업에 성공했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불안감은 더해갔다. 내가 무슨 자존심으로 전공만 고집할까… 일단 아무 데나 취업하고 볼까, 일은 맘에 안 들어도 크고 탄탄한 회사가 낫지 않을까…무슨 일이든지 잘할 수 있잖아 이러다 늦은 나이에 취업까지 못하면 어떻게 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할 즈음, 20곳 중, 딱 한 회사에서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드디어 나도 취업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것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면접을 봤다. 실습 프로젝트를 뭘 했는지부터 시작하여 이것저것 전공 관련 질문을 하시며 고개를 끄덕이는 연구소장님 모습을 보니, 취업을 기대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조심스레 들었다.
며칠 후, 합격통보를 받았고, 취업소식을 주위사람들에게 알렸다.
‘나 다음 주부터 출근해.’
‘그래? 어디 회사?’
‘00000라는 회사야’
‘처음 듣는 회사네… 직원이 몇 명이야?’
‘10명 정도?.’
‘…………’
주위 사람들에게 내 취업소식을 전하면 대부분 얼마나 크고 유명한 회사인지, 직원수는 몇 명인지부터 묻는다. 작은 규모의 처음 듣는 회사의 이름을 말하면 그 뒤로는 말이 없고 화제를 돌리게 된다. 하지만 난 괜찮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회사의 규모 따위는 상관없었다. 부족한 날 뽑아준 것만으로 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내가 원하던 일을 시켜준다는 것에 너무 기뻤다.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이력서 준비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혼자 해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기만 했다. 감출 수 없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헤헤거리며 남은 학교 생활을 마무리했다.(작은 회사를 다니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세상 물정 모른 채 마냥 기뻐하기만 했던 것이다.)
첫 출근 날, 학교에서 실습 때 써보았던 계측 장비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는 걸 보니, 진짜 안심이 됐다. 내가 제대로 회사를 골라서 왔구나. 내가 배운 전공지식이 실제 어떻게 적용되고 필요한지를 알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아침 조회 시간에 나의 입사소식을 전 직원에 알리는 사장님 목소리를 듣고 내가 진짜 취업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직원이 10명이고 내가 입사하면 11번째 직원이 되는 그 작은 회사에 난 부푼 마음을 안고 2002년 12월 9일부터 출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