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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쉬어갑니다 Aug 25. 2021

스타트업보다 치열한 세계

88년생 민지들의 이야기

5년 전 (벌써 5년 전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이 나와 30-40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었다. 영화로도 나올 정도였고, 영화 관람에 대한 찬반토론이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사회적 화두였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때 태어난 88년생 민지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민지는 딸이지만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는 부모님 밑에서 

피아노, 태권도부터 국영수 과외까지 그 시대의 아들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았다. 

입시를 치러야 하는 고등학교 때는 대치동 학원가를 종횡무진하며 서울 소재 4년제 대학교에 입학했다.

안타깝게도, 늘 그 해가 가장 힘들다는 취업 절벽에 부딪혀 대기업에 입사하진 못했지만

외국계 기업이 자글자글 몰려있다는 삼성동에서 캐리어 끌고 해외 출장을 다니며 회사를 열심히 다녔다.


그랬던 민지가 서른 살을 두 달 남긴 채 결혼을 했다.

남자 친구를 너무 사랑했다기보다는 (그렇다고 안 사랑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88년생 민지들의 과제였다.


그렇게 결혼을 한 민지는 여러 가지 고민에 봉착했다.

결혼과 여성의 의무인 임신과 출산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내 일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엄마처럼 주부로 살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을 너무 사랑하거나 회사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도 대단하지 않았기에

아기를 낳고 경력단절녀가 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깜깜했다.


고민을 하는 사이, 정확히는 임신 출산 육아와 저울질하는 시간 속에서

4년이 흘렀고, 뚜렷한 결론 없이 엄마가 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막상 엄마가 된 후 주위를 둘러보니, 

서른이 넘어서야 회사를 다니며 혹은 결혼을 하고 자아를 찾는 민지가 너무 많았다.

꽃을 하겠다고 퇴사를 해 버린 민지, 미싱을 배우는 민지, 가죽 공예를 배우는 민지, 자격증을 따는 민지, 홀연히 유학을 떠나버린 민지 등등등


엄마처럼 살지 말고 공부하라는 엄마의 말에 따라 

(그 시대의 민지들은 이 소리를 5만 3천 번 정도 들어야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남녀평등한 부모님의 지원에 따라,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 회사를 다니다 결혼을 하고 자리를 잡고 보니 

공허함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고 이렇게 재미없는 회사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 되고 싶던 나가 누구였는지 자아실현의 욕망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회사만 아니면 다 될 것 같았고, 내가 잘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모든 민지들의 꿈이 꽃을 피울 수 있을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딸, 아내, 며느리, 직원, 혹은 엄마의 역할까지 해가면서 

뒤늦게나마 이루기 시작한 민지들의 자아, 목표, 인생이 

조금 늦고, 혹은 많이 돌아갈지라도 계속 걸어갈 수 있기를 

조금 벅차고 때론 눈물이 날지라도 그 끝에 달콤한 결말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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