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책을 만났다
독서에는 여러 효능이 있는데 그중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효능은 재미와 지식 습득, 그리고 나의 세계관 확대되는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최고로 치는 것이 세계관의 확대이다. 어떤 책을 만나 나의 세계가 확대되는 경험은 독서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이다. 최근에 읽은 사피엔스는 읽는 내내 '이래서 책을 읽는구만!' 이란 생각이 들었고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다. 이 책이 재미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화두를 던지는 책이었다. 특히 요즘같이 코로나로 인간의 존망이 의심되는 시대에 읽어볼 만하다.
유발 하라리가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에서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하는 이 책은 <총, 균, 쇠>와 비슷하게 빅 히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빅 히스토리란, 역사를 한 나라나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역사를 구석기시대부터 현대 혹은 미래까지 '인류'의 관점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물론 현재 어떤 나라의 상황을 각 국가나 개인이 처한 상황을 무시하고 다루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거니와 이스라엘 출신의, 제1 세계의 한 사람이 전 인류를 과연 편견 없이 분석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꽤 수긍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로 책을 전개하기도 하고, 세계화의 시대에 인류 전체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곱씹게 만든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주제다. 인류의 역사라니. 역사를 무썰듯 자를 수는 없지만 저자는 총 3가지의 혁명에 의해 별것도 아닌(!) 사피엔스 종이 여기까지 왔다고 본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다. 이 세 가지 혁명을 듣고, 자연선택이라는 진화에 의해 인간은 점점 똑똑해지고, 농업으로 문명이 번성했으며 과학 혁명으로 전 인류가 먹고살기 좋아졌다는 얘기를 상상했다면 이 책의 정반대 주장에 기겁을 할지도 모른다. 저자에 의하면 인지 혁명은 그저 우연이였을 뿐이고, 농업혁명으로 인간의 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개개인 생활의 질은 현저히 떨어졌으며, 과학혁명은 자본주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과학은 인간을 살기 좋게 하는 방향이 아니라 돈이 제대로 굴러 가게 만드는 바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띠용!
그뿐인가. 인지 혁명으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알게 되어 버렸는데 이 상상력으로 인해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의 질서를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상상의 질서에는 신분제, 종교도 있고 심지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 인권도 포함된다. 인권이 상상에 불과하다니 너무나 불편한 주장이다. 하지만 현대인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중세시대에는 어떤 농부도 자신이 귀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고 로마시대에는 어떤 평민들도 노예를 자신과 동급의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잘 따를 수 있게 되고, 농업혁명으로 인해 바보들도 죽지 않고 살아있게 됨에 따라 사회의 크기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신분제란 왕 입장에선 엄청 편한 도구였을 것이다. 가만히 놔둬도 개개인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데, 아무리 멍충이라도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어쨌든 사회의 크기는 무럭무럭 자라게 되는데 재밌는 지점은 이 시기 농부들의 영양 상태는 수렵 채집인에 비해 좋을게 하나 없다는 점이다. 다양하게 먹지도 못하고 맨날 밀만 먹고 세율 50%의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일반 농부들에게 농업혁명이 좋을게 뭐란 말인가. 이 대목은 현대의 닭과 돼지, 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개체수로 보자면 역사상 유례없이 번성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종들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을까? 만약 지금 당장 인류가 뭔가의 이유로 다 죽고 어느 날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한다면 외계인들은 지구의 주인은 닭이라고 생각할 거란 말이 있다. 그만큼 닭의 개체수는 엄청나다. 하지만 닭이 사육되는 환경을 본다면 닭들이 행복하다고는 어떤 기준을 대도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소, 돼지도 마찬가지다. 현대는 엄청난 효율적 생산의 시대인데 그 효율이 어떤 것을 희생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문장은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라는 문장이다. 세계사는 어떤 주인공에도 정을 붙일 수 없는 치정극 같다.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가차 없이 죽이고 문화를 묵살하는 짓을 여태껏 해왔는데 그 DNA를 가지고 살아남은 인류가 현대에 와서도 엉망진창인 것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가장 재밌게 읽었던 파트는 과학 혁명이다. 최근에 읽었던 홍춘욱 박사의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와 겹치는 부분도 많고 서로 보완되는 내용도 많아서 더 재밌었다. 아직 두권 다 안 보신 분이라면 두 권을 차례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과학 혁명이 재밌었던 것은 '나는 모르는 것이 있다'는 무지의 발견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자신이 세상을 다 알고 있고 인민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학은 저 지평선 너머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에서 출발한다. 공대인으로서 이 부분은 정말 공감이 갔다. 두꺼운 교과서 대부분은 theorem으로 이루어진다. 즉 대다수가 가설이란 것이다. 현재는 맞지만 내일은 틀릴 수 있는 어떤 명제들 말이다. 모를 수 있다고 인정한 덕에 더 많이 알게 되는 역설에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난 사피엔스를 정말 재밌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너무 싫었던 점도 있다. 너무 싫어서 화가 났던 점들이다. 첫째로 인권이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인권이 가상의 질서이고 필연의 산물이 아니라면 어떨 필요든 어떤 사건이든 인권이 발생하게 된 계기나 동력이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한 답이 없다. 아마 저자도 거기까지 답하려면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해서 그랬을 수 있지만 '이건 다 가짜인데 나도 답은 없어'라고 회피하는 것 같았다. 시니컬하게 말하면 똑똑해 보인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난 인권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알고 싶다.
둘째로 미래 예측이 너무 비관적이다. 이 책에 따르면 물리학자에게 특이점이란 빅뱅인데 빅뱅 이후에 시간의 개념이 생기기도 했고 빅뱅 이전은 전혀 상관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특이점은 인공지능의 특이점인데 그 이후에는 사피엔스의 존재는 아무 의미도 없어질 것이며 더 나은 존재가 나타나고 사피엔스 종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난 허무주의가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소해도 매달릴 의미가 있는 게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사피엔스의 미래 예측은 너무 허무하다. 허무함을 이기기 위해 갑자기 명상 같은 주제를 가지고 오는데 공감이 되지 않았다. 저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지만 힘든 날 의지할 수 있는 책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며 살기 위해 수백 번이라도 틀리고 싶다.
6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을 읽고 나니 성취감이 엄청났다.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어 졌다. 사실 최근에 술 마시면서 사피엔스 얘기를 너무 했더니 친구들한테 미안하다. 여기 있는 내용은 술자리에서 내가 무한 반복한 내용들의 일부분이다. 책을 읽고 이렇게 까지 빠져본 적이 있었나 생각이 든다. 인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밀레니얼의 특징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 야 말로 가장 밀레니얼적인 인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인류, 이 쓰레기들! 이라며 화를 냈다가 역시 희망은 인류에게 있다고 생각하기를 반복했다. 이 책은 인류에서 시작해 결국은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어쩌다 보니 이런 시대가 왔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 거야?'라는 물음에 천천히, 그리고 끈질기게 답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