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아무튼, 메모>는 아무튼 시리즈의 하나로, 정혜윤 피디의 책이다. 부산 여행중 들렀던 손목서가에서 구입했다. 손목서가는 정말 아름다운 독립서점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읽으며 글루바인을 마실 수 있는 멋진 공간이기도 하다. 손목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제목은 알고 있었던 책이긴 했는데, 첫장을 읽고 바로 구입했다. 그 당시 나는 사피엔스를 정말 재밌게 읽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싫어하고 있었다. 그 책의 날카로움과 가치 중립적인, 어느 것도 판단하려 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날카롭고 딱딱하고 건조해서 오히려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튼 메모> 이 책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책이었다. 이 책은 첫장부터 아주 생생했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니체는 인간이 예술과 같은 '거짓 숭배'를 고안해 내지 않았다면 삶을 견기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거짓 숭배'가 없다면 과학의 솔직함에 역겨워 죽었을 것이라고. 그런면에서 내가 평생을 어떤 책에 의지해야 한다면 나는 절대 사피엔스에 기대어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메모에는 하염없이 의지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정혜윤의 문장들
>카뮈의 “나 자신만을 위해서는 울지 않는다”, 쿤데라의 “슬픈 날 영혼의 이상 팽창” 같은 문장을 알게 되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 내게는 얼마나 좋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모름지기 영혼은 향이 나야 한다. 모름지기 사람의 눈은 빛이 나야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아버지, 니코스카잔차키스 가족은 어느 해 홍수 때문에 포도 농사를 다 망쳤다. “아버지, 포도가 다 없어졌어요”, “시끄럽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이에 대한 니코스의 말. “아버지는 재난을 지켜보며 아버지 혼자만의 위엄을 그대로 지켰다.”
>외롭고 무서운 문장 하나를 적어보겠다. 그는 세상 무엇과도 무관했다.
>플로베르: 나를 괴롭히는 뭔가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나의 크기를 모른다는 거지. 나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해. 어느 정도까지 당길 수 있는지 근육의 힘을 알고 싶어.
>어쨌든 사회 속에서의 삶이 수동적일수록 능동적인 부분을 늘릴 필요가 있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이 사회와는 조금 다른 시간 고정관념, 효율성, 이해관계와 무관한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개인이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적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그저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 가만히가 아니라 '의도적’ 으로 살 필요가 있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붙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
정혜윤의 글에서 좋은 인간이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지키되, 세상과 함께 나아가는 인간이다. 세상의 슬픔과 부조리에 공감하고, 나 하나쯤이라고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그와 동시에 자신을 잃지 않고 나의 마음의 근육을 부지런히 단련하는 사람. 나도 그녀가 말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세상의 거지같음을 알고도 애정을 줄 수 있는 그런 강하고 위엄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싶어진다는 게 이 책의 멋진 점이다. 마음이 어지러워 진다면 이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펴고 읽더라도 좋은 처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