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승진 비슷한 걸 하게 되어 3명의 팀원을 이끄는 팀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일해왔고 일당백으로 문제 격파에만 몰두해 오다가 2년전 조금 더 큰 규모의 회사로 이직하면서 혼자서 잘하는 식의 커리어를 쌓는것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커리어란 개발자는 개발만 잘 하면 됐지! 라는 단순한 개념 뿐이었는데, 그러다보니 회사에서 내가 맡을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느꼈다. 사실 난 문제 해결 자체를 좋아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회사의 비지니스나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많은 관심이 있다. 하지만 개발만 잘 하는 개발자에게는 해야할 일이 결정되서 주어질 뿐, 이 제품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 지는 내 권한 밖이 일이 되었다. 물론 나도 의견을 낼 수 있고 다들 잘 들어주긴 하지만, 중요한 맥락은 늘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나의 불만을 개발 팀장님께 털어놨더니, 감사하게도 파트를 하나 맡아보라고 하시고 적극 지원해 주셨다. 사실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리딩하는 역할을 맡게 된 셈이라, 신나기도 하면서 걱정도 되었다. 사실 큰 걱정은 없었는데, HR에서 파트 리드 교육을 진행하는걸 듣고 나니 리더쉽이란 거저 얻어지는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 리드 교육은, 교육 자체는 한시간 이었지만 읽기 과제가 있었다. 바로 <실리콘벨리의 팀장들> 이라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느낀점을 서로 공유하고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는지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팀을 리딩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자신의 리더에게 받았던 좋은 경험 등을 공유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 특히 다들 이 책에 나오는 지독한 솔직함에 대해 실제로 실천하기 정말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했다. 솔직함이 공격으로 다가가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친분이 쌓여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기존의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정서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라 그 점이 흥미롭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는 평이 있었다. 정신과 의사들도 환자와의 라포(신뢰)가 쌓여야 제대로 상담을 할 수 있다고 하던데,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모든 관계는 정서적 안정감에 시작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일에 있어 정서적 안정감이란 편안하고 즐거운 상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비판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말하자면 잘 싸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건장한 상태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리더나 팀원 모두 이러한 정서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논의하고 대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서로 좋은 말만 해서는 발전이 없다. 그리고 책은 이런 튼튼한 자아는 일이나 삶에서 같아야 한다고 한다. 일과 삶을 분리해서 균형을 맞추는, 몇년전부터 유행하던 워크-라이프 밸런스라는 단어를 전면 부정한다. 이 둘은 분리하여 균형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곧 나요 내가 곧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다. 일을 자아실현과 동일시해 온 나에겐 공감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걸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점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나는 남을 바꾸는 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책을 읽다보니 사실 리더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 놀라웠다. 내가 해야할 일도 많지만 나도 나의 리더에게 더 기대도 될 것 같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일하는 방식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GSD바퀴라는 업무처리 방법이 있는데 듣기-정리-논의-결정-설득-실행-학습- 그리고 다시 듣기로 돌아가는 순환 구조의 방식이다. 각각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듣기: 침묵하는 이에게 발언권을. 차분한 듣기 vs 요란한 듣기 중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택하라. 작은 의견이라도 듣는 문화 만들어야 한다.
정리: 선택하고 제거하고 강조하라. 아이디어 정리, 아이디어 전달하기. 케인스의 천재성이 머릿속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논의: 사람과 아이디어는 마찰과 소음을 통해 빛난다. 에고가 아니라 아이디어에 집중하라. 의무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라. 반드시 휴식을 취하라. 논쟁을 끝낼 시점을 분명히 하라. 논의가 힘들다고 해서 서둘러 결정을 내리지 말라.
결정: 에고를 벗어던지고 객관적으로 결정하라. 의사결정자는 의견이 아니라 사실을 구해야 한다.
설득: 팀원의 힘을 하나로 뭉쳐라. 화자가 아닌 청자의 감정을 고려하라. 전문성과 겸손함을 드러내어 신뢰를 쌓는다. 자기 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논리를 설명한다.
실행: 협력세를 최대한 줄인다. 팀원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직원의 실행을 지켜보는 것은 물론, 스스로 실행에 참여해야 한다. 실행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라.
학습: 실패에서 배운다는 것. 현실을 부정하지 말고 직면한 결과에서 배워라. 일관성에 대한 압박을 이겨내라. 사실이 바뀌면, 그에 따라 생각도 바뀐다. 심리적 강인함으로 번아웃에서 벗어나라. 스스로 중심에 머무르는 능력으로 심리적 강인함을 얻을 수 있다. 트위터 ceo는 매일 혼자서 생각에 빠질 2시간을 확보하는 원칙으로 스스로의 중심을 찾는다.
단계 하나하나 쉬운 것은 없어 보이지만, 합리적 의사결정을 위한 방식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리더 역할을 만만하게 봤던 나의 지난날이 부끄러워진다. 나는 초보 팀장이니까, 하나하나 실행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다. 모든것을 한번에 완성하겠다는 초심자의 조급증은 넣어두어야 할 타이밍이다.
이 책을 보면서 이런 건실한 토론 문화나 거침없는 솔직함을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가 한국에서 가능한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실리콘밸리의 팀장이 아닌 K-팀장들이 잘 할 수 조직문화에 대해서도 사람들과 토론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