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어제 저는 오랜만에 외출을 했어요. 하용수 삼촌의 양아들 태양이 형의 부탁으로 동대문을 다녀와야 했어요. 연말까지 재택근무라 밖이 좀 그리울 찰나에 온 부탁이라 그리고 옛 생각도 좀... 나고 그래서 흔쾌히 다녀왔죠. 저는 서른 전까지 의상을 디자인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동대문은 제 손바닥 보듯 훤히 보여요. 처음 가시는 분들에게는 미노타우르스만 없지 라비린스(미로) 같은 곳이에요. 부탁한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일러준 셔츠 공장을 갔는데 이게 웬걸 제가 처음 동대문이란 곳에서 셔츠 공장을 갔던 그 공장 아니겠습니까. 사장님은 키가 작고 건고사리 같은 생활 근육들을 가진 전형적인 몽골리안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신 분인데 문 앞에서 잠깐 멈춰서 내가 여기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더라 생각해 보니까 얼추 5년 전이더라고요.
저는 동대문 시장을 좋아해요. 물론 양아치 같은 사람도 있지만 제 기억으로는 사람 냄새나는 장소 중에 하나 에요. 아침부터 분주하고 살기 위해 분투하고 점심되면 그 작은 통로에 김치찌개며 된장찌개 등등 음식 냄새가 혼합되어 모든 게 짬뽕되어 있고 밥상머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대충 치우고 신문지 깔고 거기서 친한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모여서 먹는 밥은 미슐랭 저리 가라 거든요. 어찌나 남일에 관심이 많으신지 누가 누구랑 사귀고 동거하고 뭐 그런 거 다 속속들이 알고 계시고 허벅지만 한 라디오 하나 틀어 놓고 하루를 버티시는 분들도 계시죠. 저녁 되면 생선구이나 닭 한 마리 먹으며 소주 한잔 밀어 넣고는 내일을 준비하시죠. 투박한 동대문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힘든 시기 이겨낸 어른들, 한국을 지탱한 주역들인데 본인들은 단지 살기 위해 했을 뿐이지 그 사실을 모르고 사세요. 자부심 좀 가지셔도 되는데.
문을 열고 들어갔어요. 제가 상상한 모습보다는 훨씬 늙으셨지만 제가 가진 에너지를 끌어 모아 오두방정을 떨며 아이고 사장님! 오랜만이에요. 저 기억하세요? 어쩜 늙지도 않으셔~ 피부 좋은 것 봐 뭐 좋은 일 있나 봐?? 하며 인사를 드렸죠. 마스크를 써도 가려지지 않는 제 잘생긴 얼굴을 기억하셨는지(사실 제가 일감 많이 드렸거든요) 사장님도 알아보시고는 반갑게 바로 정수기 쪽으로 가시면서 5년 전 그대로 믹스커피를 타다 주셨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5년 만에 본사이에 10분 인사하면 진짜 오래 인사했다고 칭찬받을 일이거든요. 커피를 받아 들고 또 아차 싶은 것이 사장님은 이야기를 한번 시작하시면 그 자리에서 1시간은 기본으로 이야기하시는 분일걸 잊은 거 있죠.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풀어내시기 시작했어요. 시계를 보니 2시간 정도 여유가 있겠다 싶어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참을 들었죠. 집안에 크고 작은 경조사부터 막내 딸네서 키우는 해피의 3남 3녀 무사 출산 소식까지 제가 사장님 가족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만들었어요. 저는 거의 반사적인 리액션만을 취하고 있었는데 한번 시작한 말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사장님이 말이 많은 이유 저처럼 완벽한 대나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들 다들 가슴속에 품고 살잖아요. 가끔 허공이 아닌 반려동물이 아닌 서로 소통이 가능한 사람에게 하고 싶은데 가장 가깝기에 할 수 없는 말들. 순식간에 2시간은 흘렀고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다 말씀드렸죠.
저는 정말이지 피하고 싶었지만 제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말씀하셨어요.(코로나 확진자가 1000명이 넘는 날)
복 받을 겨.
저는 '아유~ 사장님도 복 받으실 거예요.' 이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정말 진짜로 거짓말이 아니고 실수로 '아유~ 사장님 복 다 가져가세요~' 이렇게 웃으며 말해 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진짜 친한 사이라 망정이지 정색하며 말했으면 어찌나 죄송할 뻔했는지. 저희는 ㅁㅓ쓱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에게 서비스 시간 20분을 죗값으로 헌납해야 했죠. 흡족한 사장님은 방금 막 전국 콘서트를 끝낸 슈퍼스타의 뒷모습으로 터벅터벅 공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도 늦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러 출발했고요.
일을 마무리 한 시간은 5시였고 장소는 한남대교 북단 쪽이었습니다. 지도 앱을 켜보니 신사역까지 30분이면 걸을 수 있겠다 싶었죠. 저는 세계여행을 할 때도 1시간 거리는 다 걸었어요. 저는 걷는 걸 좋아해요. (이건 나중에) 걸어야 할 또 다른 이유 지금은 개와 늑대의 시간, 해와 달이 바통터치를 하는 시간이기도 했고 이 모호한 시간만이 가진 세상의 컬러는 명실상부 느려야만 누릴 수 있거든요. 그리고 좀 걷고 싶은 날 있잖아요. 너무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 보니 나온 김에 뽕 뽑고 싶은 마음.
어제는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대교 끝날 때쯤에는 다 필요 없고 순간 이동하고 싶더라고요. 오늘에 교훈으로 다시는 미련한 선택 하지 말아야지. 그나저나 넷플릭스 어떤 것에 대해서 글을 쓸지 고민 좀 해봐야겠네요.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