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왠지 친근하게 느껴진다. 만약 그 사람이 무언가 찍고 있다면 나도 그쪽을 흘끗 바라본다. 그건 찍는 대상에 대한 궁금증이면서, 카메라를 든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진은 그 사진을 찍은 사람에 대해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일지라도.
사진 찍기는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새벽 호수에 피어나는 안개, 도시에 솟은 마천루까지 무엇인가를 찍는다는 건 '바라봄'을 전제로 한다. 분명한 목적을 갖고 찍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충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른다.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
1888년 코닥이 최초의 필름 카메라를 내놓았을 때 사용한 광고 문구는, 2021년 새로 발매하는 스마트폰 카메라 광고에 사용해도 손색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 찍기는 버튼만 누르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사진이 가장 대중적인 표현 매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쉬운 접근성 덕분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모두가 똑같은 사각형 안을 바라보며, 똑같이 버튼을 누르지만 누군가의 사진은 특별하다.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십중팔구 '오래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오래 바라보기는 관찰의 영역이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빈 강의실 창문'을 주로 찍는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 텅 빈 강의실 창문을, 저녁엔 노을빛이 스며든 강의실 창문을 찍는다. 두 사진을 나란히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보낸 하루를 조금은 느낄 수 있다. 글이었다면 여러 문장이 필요했을 하루가 사진 두 장으로 함축된다. 얼마 전 '이동진 평론가'가 찍은 사진을 봤는데, 그는 주로 인물의 전신이 드러나는 뒷모습을 찍었다. 어떤 대상과 거리를 두고 뒤에서 관찰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진과 직업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팔로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고유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출퇴근 길에 횡단보도를 날마다 지박령처럼 찍는 사람도 있고, 그림자만 쫓아다니는 사람, 흑과 백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 자기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 아내의 얼굴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 매년 봄이 올 때마다 같은 자리에서 꽃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다. 최근엔 '책 읽는 사람'만 모아둔 사진전을 다녀왔는데 무척 좋았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고 눈에 익은 장면인데, 오래 바라봤을 때에 생기는 흔적이랄까, 굳이 서명을 달지 않아도 누가 찍었는지 알 수 있는 경지에 닿은 사진이 좋다. 이쯤 되면 관찰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긴 거니까.
때때로 나는 그들과 비슷한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의식해서 찍을 때도 있고,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안 적도 있다. 또 어떤 장면을 바라보며 누군가 찍은 사진을 떠올릴 때도 있다. 그럴 땐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이었겠구나' 조금은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