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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진 Feb 18. 2021

나의 공간_임지민 작가_2

아홉

1

상일동역에 가까워질수록 지하철에 남은 사람이 줄어든다. 30년 넘게 서울에 살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역이다. 수첩에 적어둔 지민 작가와 나눈 얘기를 들춰봤다. 그녀는 자주 ‘그림 그리는 일’을 ‘쉰다’라고 표현했다.


"저한테 그림 그리는 건 일이 아니에요. 조교 사무실에 앉아있는 게 일하는 거죠. 그땐 시간이 참 안 가요"

“주말은 거의 작업실에서 보내요. 그림 그리는 게 쉬는 거라 따로 뭘 하진 않아요.”

내가 거듭 수첩을 들쳐보는 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싶어서인데. 이번 기회에 나도 '일하면서 쉰다'는 게 무언지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2

상일동역까지 다섯 정거장쯤 남았을 때 메시지가 왔다.

'3번 출구에서 만나요. 열차칸 8-4에서 내리면 가까워요'

지민 작가가 알려준 대로 8-4에서 내리니 바로 3번 출구로 이어졌다. 밖으로 나가니 풍경이 휑하다. 상가 대부분이 문을 닫았고, 심지어 은행마저 영업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3번 출구 쪽 아파트가 재개발에 들어가며 주변 상권 모두가 휴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도 지민 작가는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출구에서 조금 벗어나자 상가 단지가 나왔고, 상가 끝에 작은 실루엣이 보였다. 지민 작가였다.



3

내가 사는 동네에서 친구를 만날 때 보통 '망원역 2번 출구'를 약속 장소로 잡는다. 재밌는 건 친구들 마다 서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 어떤 친구는 인파를 피해 근처 골목에 들어가 있고, 다른 이는 올리브영에 들어가 쇼핑을 한다. 또 다른 친구는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 집쪽 방향으로 걷는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는 위치와 방식은 어느 정도 그들의 성격과 닮아있다. 지민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지하철에서 내릴 열차칸 번호까지 알려주지만, 약속 장소에선 조금 떨어져 기다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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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 작가는 우선 '예전 작업실'을 보여주겠다며 앞장섰다.  

'나의 공간'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녀가 처음 얘기한 것도 ‘예전 작업실’이었다.

지민 작가는 자주 그 공간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가 재개발에 들어가며 어쩔 수 없이 작업실을 옮겨야 했다. 새로 옮긴 곳 역시 내년 중순 재개발에 들어간다고 하니, 6개월 뒤 다시 이사를 가야 한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가 그나마 싸고 넓은 공간을 갖기란 이렇게 힘이 든다. 서울 외곽이거나 재개발 지역, 그게 아니면 반지하이거나 옥탑. 선택지가 별로 없다.

지민 작가의 옛 작업실은 잠겨있었고, 문에는 철거를 알리는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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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에서 나와 현재 지민 작가가 머무는 작업실로 향했다. 바로 옆 단지 아파트라 했는데 계속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길을 잃었나 싶어 물어보니 그녀는 계속 “이쯤에서 편의점이 나와야 하는데?", "한복집이 어디지?” 같은 지명을 읊었다. 이사한 지 1달이 지났는데 작업실을 못 찾는 게 조금 신기했다. 이사한 아파트가 몇 동인지 물으니 그녀는 머쓱하게 웃으며 아직 모른다고 대답했다. 조금 더 길을 헤맨 뒤 그녀가 말한 '편의점'과 '한복집'이 차례로 등장했고 곧 작업실에 도착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는 ‘365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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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 작가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녀가 많은 기억을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반려견 '돌돌이'에 대해 처음 이야기할 때, 강아지의 '종'이나 '성별' 대신 '침대에 누워있는 자세'와 '눈의 모양'으로 말문을 열었다. 난 이런 식의 설명이 낯설면서도 재미있었다. 아마도 비슷한 이유에서 그녀가 집으로 가는 길을 ‘365동’이라는 너무나 쉬운 숫자 대신 상점과 골목으로 기억하는 게 아닐까 싶다.

 


7

아파트는 거실과 방 두 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실은 그녀의 작업 공간이었고, 방 하나는 동료 작가의 작업실, 나머지 작은방은 창고로 사용했다. 거실은 6평쯤 됐다. 오른쪽은 이젤을 세워 ‘유화'를 그렸고, 왼편은 주로 목탄을 사용하는 ‘크롭 페이팅’ 작업을 했다. 각 작업에 맞는 도구가 양쪽으로 나눠져 있었다. 이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한쪽 벽면을 메운 창이었다. 이 창은 정확히 거실 가운데 위치했다. 나는 창문을 조금씩 여닫으며 자연광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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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공간은 온전히 '작업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바꿔 말해 작업과 관련 없는 물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옷걸이 조차 없었다. 대신 마트에서 볼 법한 커다란 종이박스에서 작업복을 꺼내 입었고, 입고 온 옷은 다시 그 박스에 넣었다. 책상과 의자는 작업도구를 놓는 데 사용됐고, 스마트폰은 책상 대신 바닥에서 충전했다.

작업복 위로 앞치마를 둘렀는데 물감이 튄 흔적이 이어져있어서 한 벌의 옷처럼 보였다. 물감은 작업복뿐 아니라 거실 전체에 퍼져 있었다. 마치 내 작업실이 고양이 털로 뒤덮인 것처럼, 그녀의 공간은 벽과 의자, 서랍장, 노트북과 마우스패드 어디건 물감과 목탄이 묻어 있었다. 또한 내가 더 이상 고양이 털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것처럼, 그녀 역시 이러한 환경에 완전히 적응한 듯 보였다.

 

9

음악을 틀고, 머리를 묶고, 작업복으로 갈아입는 과정은 나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 흐름이 그림 그리는 데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림 그리는 일은, 글을 쓰는 일처럼 개인적인 작업이었다. 친한 친구라 해도 뒤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게 편할 리 없었다. 나는 멀지 감치 떨어져 앉아 지민 작가가 작업에 속도를 붙이길 기다렸다.  

또 하나 예상밖에 일은 그녀가 이사온 후 한 번도 창문을 열은 적이 없다는 거였다. 이유는 벌레 때문인데 그제야 대문을 열자마자 보였던 애프 킬러가 이해됐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창문을 열어 촬영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거나, ‘ISO'를 올려 노이즈를 받아들이거나.

작업의 취지가 공간을 통해 한 사람을 알아 가는 거였고, 그렇다면 최대한 원래 공간을 유지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또한 훗날 지민 작가가 이 사진을 볼 때 열린 창문을 보면 어색하게 느낄 게 분명했다. 난 ISO를 올리고 소품 위주로 촬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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