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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나리'는 담백한 영화다. 플롯, 사건, 인물 간 관계, 촬영까지 <사건-반응-결과-관찰>이라는 '고전 영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구성이 너무나 선명한 탓에 자칫 옛 영화처럼 보일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절제된 감정' 때문일 것이다. 작품 안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에 대해, 영화는 한 가지 감정으로 정의 내리지 않는다. 그저 다음날 '아침'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크던 작던 모든 사건 이후 다음 날 '아침'이 등장한다. 가족이 트레일러 하우스에 이사 온 날부터 데이빗이 할머니에게 오줌을 마운틴듀로 속여 혼난 날, 창고에 불이 난 날 모두 마찬가지다. 그 아침 쇼트에는 어김없이 햇살을 담겨있다. 매번 새롭게 시작되는 아침과 그때마다 투명하게 빛나는 햇살은 이 작품이 정서를 쌓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긍정'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 햇살은 트레일러에서 첫 번째 밤을 보낸 데이빗의 얼굴에도 비추지만, 풍이 온 할머니 얼굴에도 공평하게 떨어진다.
인물 간 관계 역시 같은 공식안에 있다. 아버지 제이콥(스티브 연)이 '행동'하면, 어머니 모니카(한예리)는 '반응'하고, 앤(노엘 조)과 데이빗(앨런 김)은 그 모습을 '관찰'한다. 재밌는 건 영화속 모든 갈등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태풍이 왔을 때도 영화가 다루는 건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아니라, 그것에 반응하는 인물들이다. 인종차별 역시 이민자로 겪을 법한 외부 갈등이지만 몇몇 대사로 가볍게 지나간다. 아마도 감독은 '가족'에 집중하기 위해 외부에서 오는 문제를 최대한 배제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 갈등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건 할머니 순자(윤여정)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순자의 대사는 정말 많다. 가장 좋은 건 "데이비사"이지만 그 밖에도 "너무 애쓰지 마." , "노땡큐 천당", "천천히 가자."도 좋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사를 꼽으라면 데이빗과 함께 산책하며 뱀을 봤을 때 하는 대사일 것이다.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나은 거야. 숨어있는 것이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거야."
이것은 영화에서, 또 이 가정에서 순자의 역할이다.
순자가 오기 전까지 이들은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갈등을 겪더라도 감정을 모두 드러내진 않는다. 영화에서 부부가 함께 나오는 씬은 많지만 정서적으로 가까운 장면은 드물다. 예를 들어 순자와 데이빗이 같이 자는 침실은 자주 등장하지만, 부부가 같이 자는 침실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단 둘이 식사하는 장면도 한 번뿐인데, 순자가 한국에서 가져온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줄 때이다. 순자가 "저거 니들이 좋아하는 노래잖아."라고 말하면 모니카는 "그랬나?" 대답한 뒤, 잠깐 동안 텔레비전을 응시하다가 데이빗 옆에 앉아 밥을 먹는다. 이때 한예리 배우의 연기는 정말 좋다.
아마도 부부는 미국에 온 뒤 저 노래를 같이 부른 적이 없고, 그 때의 기억도 잊고 산 게 아닐까 싶다. 이어지는 장면은 마치 시의 후렴구처럼 조금 전 모니카 얼굴에 담겼던 짧은 표정을 대변한다. 영화 속에 나오는 노래 가사는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쇼트는 초라한 트레일러 하우스 외관, 가로등만 비추는 텅 빈 거리, 밤하늘이다. 이 공허한 풍경은 부부가 미국에 와서 보낸 시간의 함축이면서 또 저녁밥을 먹고 있는 '현재'이기도 하다.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나은 거야." 대사를 기점으로 영화는 이전보다 빠르게 진행된다. 이어지는 씬은 단수가 된 후 제이콥이 수도를 살피러 나가는 장면인데, 남편이 나가자 모니카는 순자에게 말한다. "저의는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다음 씬에선 데이빗이 '심장이 멈출 줄도 모른다'는 엄마와 할머니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이 날 밤 데이빗은 할머니와 같이 자면서 "나 죽기 싫어요."라고 말한다. 부모님께는 말하지 못했던 두려움을 순자에게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각자의 감정이 모두 드러나 재정립돼 건 '창고 화재 씬'인데, 이 사건을 일으키는 것 역시 순자이다.
창고에 불이 났을 때 이 가족은 각기 다른 곳을 향해 움직인다.
이 장면은 오프닝 씬과 매치된다. 오프닝 씬에서도 이들은 차를 타고 들어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차이는 서로를 향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모니카는 남편을 돕고, 제이콥도 처음엔 농작물을 꺼내다가 결국 아내를 구하며, 앤과 데이빗은 할머니에게 간다. 이때 데이빗은 처음으로 '달리기'를 한다.
미나리에는 '영화적'이라 느껴지는 몇몇 순간이 있다. 이 장면도 그렇다. 왜냐하면 영화는 앞서 여러 번 유사한 장면으로 '데이빗과 순자의 관계'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는 데이빗과 순자의 관계를 '거리', '방향', '속도'로 보여준다.
첫 번째는 데이빗이 순자에게 오줌을 마운틴 듀라고 속이고 도망칠 때다. 측면에서 인물을 따르는 촬영 방식과 앵글 사이즈는 유사하다. 하지만 감정은 정반대다. 데이빗은 순자에게서 도망치고 있다. 방향도 화재씬과는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두 번째는 데이빗이 발을 다친 뒤 할머니와 단둘이 산책할 때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씬이기도 하다. 측면에서 인물을 따라가는 촬영 방식은 같지만, 이번에는 순자와 데이빗은 같은 곳을 향해 걷는다. 데이빗이 뛰지 못하겠다고 하자 순자는 "천천히 가자"라고 말하며 데이빗의 손을 잡는다. 둘이 나무를 향해 걸어가는 장면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마지막 장면의 오마쥬로 보인다.
이렇게 '장면'을 통해 쌓아 올린 감정은, 화재씬에 이르러 데이빗이 할머니에게 달리면서 힘을 얻는다. 데이빗이 달리는 방향은 오른쪽에서 왼쪽이지만, 할머니를 모시고 돌아갈 땐 반대가 된다. 이것은 순화 구조처럼 맨 처음 트레일러 하우스에 도착했던 순간의 반복이지만, 이 가족은 그때와 달라져 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