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책임감은 거짓이다.
걱정이 컸다. 오늘을 위한 지난 일주일이었다. 처음으로 낮 최고 온도가 0도이었다. 매년 겪었을 0도이지만 얼마나 추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걱정이 컸나 보다. 덕분에 다행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했던가? 추위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에 실제 0도는 평범했다.
개는 추워도 괜찮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런 조언을 매해 겨울마다 듣는다. 나보고 어떡하라는 소리였을까? 개를 방치해도 무방한 계절이 겨울이라 말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개에 대해 해박하다는 것을 뽐내고 싶었을까?
이도저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나가는 인사말보다 못한 말로 던져버린 잔해였을 것이다. 어쩌면 나를 위한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겨울을 개와 살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을 아는 이라면 나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동기를 떨어뜨릴 목적이었을 것이다. 애쓰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달라질 것이 없다고 말이다.
목적이 다르다. 힘든 시간을 거친 개, 즉 유기견으로 분류된 개들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 대부분의 목적이다. 겨울이라도 개가 얼어 죽지만 않으면 괜찮은 부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다른 목적을 가진 이의 말에 내어줄 시간이 녹록지 않다. 나는 개가 오늘을 살아가길 바란다. 그것뿐이다.
살아가는 일이 전부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마찬가지가 아니다. 우울증에 빠져 사는 이와 삶의 목적이 뚜렷한 이의 오늘이 같을 수 있을까? 어차피 살아가는 것은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체가 사람에서 개로 바뀌는 순간 사람들의 말에 버릇이 없어진다.
살아가는 일은 희로애락이다. 좋은 일만 가득해서는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힘들었던 만큼 좋은 시간에 의미가 부여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 힘들었던 시간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개의 힘든 시간에도 분명 그럴 것이라 믿는다.
가해자를 찾지 않는다. 유기견으로 분류된 개에게 어려움이나 힘듦은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가장 불만이다. 아무 문제없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애쓴다. 아무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견사에 넣어 장물처럼 취급하는 모습이 딱 그렇다. 사람을 골라 구조될 수 없기에 일어나는 참사이다.
괜찮을 리 없다. 겨울철 마실 물이 얼어도 괜찮다고 떠들던 이가 있었다. 밤 중에 개가 얼음을 깨먹는 장면을 촬영하고는 증거라며 내밀었던 몹쓸 사람이었다. 변별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내밀 수 있는 패는 고작 그 정도였다.
오늘만 산다. 영화에서 가끔 들리는 대사 같다. 정말이지 오늘만 살아가고 있다. 어제의 모자람을 오늘 채우지 않는다. 정확히는 여력이 없다. 오늘의 부족함으로 내일의 계획을 세우지도 않는다. 내일은 오늘과 다른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개들이 오늘을 살아가게끔 한다. 내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추운 겨울에 낭비벽으로 난방을 고집하는 이유이다. 추운 것과 따뜻한 것이라는 선택지가 개에게 있어야 한다. 못난 이들이 정한 오답만을 개에게 들이미는 짓은 그만해야 한다. 무엇이 옳은지, 혹은 어떤 것이 더 나은지를 택하는 이는 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유기견을 책임질 능력 따위 없는, 그저 도움을 주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