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재심
2000년, 전북 익산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은 경찰 수사를 통해 범인이 잡히고 종결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에 재심을 신청한 변호사가 등장한다. ‘박준영’ 변호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당시 사건 수사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주장하고 사건의 재심을 신청한다. 당시 살인 사건으로 지목된 피의자는 10년을 감옥에서 복역하고 나온 상태였다. 이 사건은 큰 화제를 불러 모았고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되었다. 영화 <재심>은 ‘약촌 오거리 살인사건’과 관련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재심>은 법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형적인 캐릭터다. 정의로운 변호사, 핍박받는 소시민, 공권력을 바탕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권력자들이 대표적이다. 각각의 인물은 재심 변호사 ‘준영(정우)’, 억울하게 누명을 쓴 ‘현우(강하늘)’, 강압적 수사 형사인 ‘철기(한재영)’로 상징된다. 여기에 주제 의식을 살리기 위해 준영의 친구로 ‘창환(이동휘)’이라는 인물까지 등장한다.
<재심>은 법과 공권력의 두 가지 얼굴을 고루 보여주고 있다. ‘준영’이 상징하는 정의/시혜라는 측면의 법, 그리고 ‘철기’가 상징하는 강압이라는 측면의 법이 그 양면이다. 이러한 특징은 극 중 인물의 배치와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 쉽게 느낄 수 있다. 소시민을 상징하는 ‘현우’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현우는 극 중 준영과 투 샷을 받는 장면이 많다. 이 때 두 캐릭터는 프레임 안에서 동일한 비중을 두고 위치한다. 이 때 둘의 시선은 대체로 수평적이며 한쪽이 우위에 서있는 경우는 잘 없다. 카메라는 그들을 아이레벨 쇼트로 촬영한다. 아이레벨 쇼트란 눈높이에 맞게 피사체를 찍는 앵글을 뜻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중립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자신도 극 중 인물들과 평등한 시선에 서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반면 철기가 등장하는 씬은 조금 다르다. 철기는 법의 악한 면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철기의 수사방식은 한결같다. 범인이라고 의심되는 인물을 구타해 억지로 범행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대상을 끌고 온다. 그리고 대상을 넘어뜨리거나 무릎 꿇여 그 우위에 선다. 철기는 대상을 내려다본다. 두 인물이 위와 아래의 구도로 나뉘어 한쪽은 내려다보고 한쪽은 올려다본다. 물리적으로 철기가 지배하는 공간은 모텔이나 폐건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공권력이라는 틀이다. 그 틀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악용해 소시민들의 우위에 서는 것이 철기가 상징하는 악한 힘이다.
하지만 ‘준영’이라는 인물이 평면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그는 극 초반부에 돈과 성공만을 밝히며 정의를 무시한다. 이 때 그가 한 행동은 향후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는 변한다. ‘다시 심사한다.’라는 뜻의 ‘재심’처럼 준영은 자신의 가치를 다시 판단한다. 이 행동은 그에게 새로운 사고를 불어넣어 줌으로 그를 ‘재생(再生)’시킨다. 돈만 밝히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에서 방향을 틀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준영’이 기존에 추구하던 방향을 바꾼다는 소재는 사실 극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현우 사건을 맡으러 가는 길에 원형의 고가 도로에서 방향을 돌리는 모습을 오랜 시간 비추며 그 상징을 드러낸다. ‘재심’의 ‘재’는 ‘다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한 번의 재심을 통해 많은 것들이 다시 생명을 갖게 된다. 준영은 앞서 언급했듯이 진정한 법의 가치를 인지한 제 2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극의 초반 부에 정우가 했던 옳지 못한 생각들은 후일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창환은 준영의 과거 모습을 상징한다.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이 대립하는 꼴이다. 하지만 준영은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힌다. 도망가지 않고 스스로를 구원한 것이다.
현우는 억울한 누명에서 해방되고 공권력에 대한 불신에서 벗어난다. 항상 공권력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던 그의 발언들은 정의로운 면의 공권력을 발견하고 변화하게 된다. 과거의 억울함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던 벽으로부터 해방된 그 역시 제 2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 2의 삶을 얻은 것은 인물들뿐만이 아니다. <재심>은 전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법과 정의의 재생을 꿈꾼다. 주어진 실화를 통해 지금까지의 악한 행태들이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돈만 추구하는 정의와 성과만 강요하는 사회에서 벗어나 본래의 가치를 찾자고 말한다. 법질서와 국가 권력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재심>은 이처럼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영화 내내 강하게 밀어 붙인다. 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아쉬운 점들이 보인다. 첫째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다는 것이다. 법정 드라마에서 한 스푼, 휴먼 드라마에서 한 스푼, 액션 한 스푼, 코믹 한 스푼, 범죄 수사 한 스푼. 많은 것들을 보여주려 하다 보니 메시지 전달이나 표현이 퇴색되어 버린다. 둘째는 불필요한 캐릭터들이 많아 이야기가 산만해졌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부분과도 연관되는 내용인데, 여러 요소들을 집어 넣으려다보니 자연스레 등장인물들이 많아진다. 구태여 비중을 두지 않아도 되는 캐릭터에 많은 시간이 할애되며 이야기의 정체성마저 혼란스러워 진다.
하지만 <재심>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만큼은 건강한 사회를 꾸려나가는 데 필수적이다. 악용되는 힘이 가진 위험은 엄청나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집단의 핵심 주장도 이것과 일맥상통하다. 실제로 법은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다수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방 구조에도 불구하고 ‘약촌 오거리 사건’같은 안타까운 사례들이 발생한다. 그렇기에 법 집행자들은 투철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신중히 업무에 임해야 할 것이며 시민들은 권력을 악용한 만행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감시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뒷받침 될 때 비로소 불신에서 해방된 이상적인 공권력이 새 삶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