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는 먼저 출발하고, 천천히 걷는 방법밖에 없다. 프랑스아저씨, 크리스티앙, 키캐를 뒤로하고 폰세바돈을 향하여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다다르고 비로소 허리를 피니 스페인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연 앞에서는 인간은 미미한 티끌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다. 조금 더 걸으니 누군가 나무에달아놓은 그네가 눈에 띄어 잠시 그네에 앉아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앞뒤로 그네가 움직일때마다 살랑이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어 기분까지 좋아졌다.
"아란~~" 저 멀리 손을 흔들며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두 사람.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뿐한 발걸음으로뛰어온다. 먼저 도착한 건 크리스티앙이었다. 오르막길을 거침없이 뛰어온 그의 구릿빛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혀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에게 물었다.
"아란, 왓 아 유 두잉?"
"너무 힘들어서 쉬고 있어요. 오랜만에 그네 타니까 재밌네요."
키캐가 통역을 해주었고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남기고 폰세바돈을 향하여 갔다.
"아스따 루에고."
그네를 타며 식은 땀 덕분인지 다시 알베르게를로 걸어가던 중 작은 슈퍼 하나가 보였다. 아일랜드에서 가져온 샴푸가 바닥난지 3일째, 비누로 머리를 감아도 괜찮을줄 알았지만 돼지털처럼 머릿결이 거칠어져 있었고 슈퍼에 들러 샴푸를 사기로 마음 먹었다. 더위도 식힐 겸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서 열심히 걸음을 재촉하던 중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빨간 벽돌에 걸터앉아 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또 만나네요. 부엔까미노."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크리스티앙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양팔을 벌려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까지만 이라도 여기서 잠시 쉬는 게 어때?"
"좋아요." 가방을 놓고 그들옆에 나란히 앉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저 멍하니 스페인의 푸른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한정적을 깨고 가장 먼저 말을 건 건 키캐였다.
"우리는 발렌시아 출신이야. 크리스티앙은 건축가, 나는 라이언에어 승무원으로 일하다가 몇 달 전 그만뒀어."
"전 스물다섯 살이에요. 한국에서 일하다 그만두고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 중이에요. 파울로코엘료처럼 저도 이 길을 통하여 직업을 찾고 싶어요. 아이스크림 다 먹었으니 이만 갈게요. 아스따 루에고."
키캐는 크리스티앙에게 통역을 해주었고 크리스티앙의 하늘색 눈동자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듯했지만 그들에게 아이스크림 빈 막대를 보여주며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다.
산티아고 순례가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와 어울리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못된 습관이 하나 생겼다.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여 가까스로 마음의 문을 닫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버려진 마을' 폰세바돈 공립 알베르게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OPEN 14:00'
잠겨있는 알베르게 문과 문에 걸린 푯말을 보고 다른 알베르게에 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 일어났는데 이내 도착한 글로리아가 말한다.
"아란! 이 알베르게가 다른 알베르게보다 아늑하고 조용해. 조금 더 기다렸다가 여기에 묵는 게 나을 거야."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자리에 앉아오후 2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글로리아, 로쵸, 장까를로도 다시 만났고, 크리스티앙과 키캐도 뒤이어 도착했다. 가방을 번호표 삼아 도착한 순서대로 알베르게 입구에 세워두었다.
알베르게 문이 열릴 때까지는 족히 1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할것도 없고 문득 의사가 한 말이 생각나서 앉아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주먹으로 발바닥을 두들기고 있는데 크리스티앙이 나를 보며 말했다.
"왓 아 유 두잉? 하하하하하"
살짝 당황하여 얼버무리고 있는 사이 글로리아가 대변인이 되어주었다.
"우리가 1주일 전인가?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의사가 시간이 날 때마다 발바닥을 두들기며 마사지를 해주라고 했어. 이렇게 하면 혈액순환도 잘되고 발마사지에도 좋다고 하더라고."
그녀의 말을 들은 10명의 순례자들 모두 신발과 양말을 벗고 주먹으로 자신의 발바닥을 두들기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이윽고 알베르게 문이 열리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씻고 세숫대야에 찬물을 받아 밖에서 발을 담그고 일기를 쓰고 있는데 저 멀리 한 남자가 두리번두리번 하더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레몬색 티셔츠를 입은 그의 친구가 그 옆에 또 잡고 앉는다. 크리스티앙과 키캐의 관심이 반갑긴 하지만 살짝 어색하기도 해서 아무 말을 마구잡이로 두 사람에게 쏟아낸다.
"의사가 그러는데 찬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부기 빼는데 좋대요. 그래서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씻고 항상 찬물에 발을 담그고 있어요."
어색한 미소를 그들에게 지어 보였고 두 사람은궁금한게 참 많은지 질문을 계속 했다.
"우리도 작년에 아일랜드 더블린 간 적 있어. 기네스공장에서 마시는 기네스는 정말 맛있던데. 더블린에서 공부하는 거야?"
"아니, 나는 더블린에서 3시간 떨어진 골웨이에 있어.. 음.. 기네스 맥주 정말 맛있지. 내가 아일랜드에 온 이유기도 하고. "
나의 돼먹지 않은 농담으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고 가까스로 밀고 있었던 수문이 열리면서 거센 물줄기처럼 따스함이 마음에 가득 밀려들었다. 키캐가 웃으면서 통역을 해주니 크리스티앙 눈이 또 한 번 번쩍했다.
"리얼리?"
"아니 농담이야. 그렇지만 기네스 맥주를 정말 좋아해. "
"나도. 기네스가 내 최애 맥주야.. 나는 승무원 하면서 일본이랑 중국에는 가본 적이 있는데 한국에는 가본 적이 없어."
키캐가 말을 마치자마자 크리스티앙은 목에 걸고 있는 검은색 염주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보여? 이 염주 중국 여행 갔을 때 사 온 거야."
"다음에 한국에 놀러 와. 내가 관광시켜 줄게."
"약속하는 거다"
두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약속을 했다. 그리고 곧장블랙베리 휴대폰에 내휴대폰번호와 이메일주소를 저장했다. 나도 일기장 맨 뒷장에 두 사람의 휴대폰번호와 이메일을 적고 있는데 크리스티앙이 말했다.
"우리 같이 점심 먹을래?"
"아, 미안, 나 안토니오가 점심 같이 먹자고 해서.. 다음에 같이 먹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빨리 먹으면 체하듯, 빨리 친해진 관계는 탈이 날 것 같아 조심 또 조심했다.
점심식사 후 산책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저녁시간이 되었다. 알베르게에 머무른 사람들은 스무 명 남짓, 알베르게에서 제공해 준 재료로 순례자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방식이었다.
화장실 다녀온 사이, 순례자들이 다들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글로리아 옆에 앉으려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크리스티앙이 "아란~" 하며 손을 흔든다.
"아란, 여기야 여기!!"
"고마워요. 보나뻬띠."
함께 저녁을 먹으며 웃고 대화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상당히 편하고 즐거웠다. 요 며칠 혼자 사색에 잠겼었는데 두 사람을 통하여 오늘 만큼은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스페인어를 경청해 주고, 아무리 밀어내고 혼자 있으려고 할 때도 '아란~' 하고 나를 부르며 크리스티앙과 키캐의 달콤한 목소리에 나는 꽃으로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