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은 긴 하루의 끝자락에서 지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다가왔다. 그는 마치 신부님이 세례를 내리듯, 조용히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처음에는 웃음이 났지만 손끝에서 전해오는 그의 따스한 온기가 마음속 깊고 고요한 평화를 불러일으키며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잠시동안 우리는 그렇게 있었고 그가 손을 떼자 나는 말했다.
"정말 고마워.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늘 하루는 정말 버거웠을 거야. 옆에 있어줘서, 함께 걸어줘서 고마워."
크리스티앙은 살짝 머쓱한 듯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로 돌아갔다.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워 누워 오늘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고단했는지 금세 잠에 빠져들었지만 나는 한참을 뒤척인 끝에 잠이 들 수 있었다. 시에스타를 즐기고 일어났는데 두 사람은 달콤한 꿈이라도 꾸는 듯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조용히 일기장을 챙겨 그들이 깨지 않도록 까치발을 들고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따스한 스페인의 햇살이 나를 또 한 번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일기장에 하루 일과를 정리하며 잔잔한 여운에 젖어들었다. 혼자만의 여운에 빠져있다 고개를 들었는데 창문 너머에서 두 개의 하늘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나의 모습을 본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키캐와 함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란, 여기서 뭐 해?" 그가 물었다. "일기 쓰고 있어.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서 안 깨웠어."
"배 안 고파? 난 배고파 죽겠어. 밥 먹으러 가자."
일기장을 덮고 그들과 함께 알베르게 근처에 있는 작은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주문을 마치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맛있는 냄새가 내 코끝과 위장을 간지럽혔다.
"아 배고파." 나도 모르게 한국어가 툭 튀어나왔다.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뭐라고?"
"'배고파'는 한국어로 'I am hungry.'라는 뜻이야"
두 사람은 스펠링을 써달라고 했고 나는 냅킨에 'Bea- Go- Pa'라고 적어주었다. 키캐와 크리스티앙은 웃음을 터트리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를 부여잡고 '배고파, 배고파'를 장난스럽게 외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들만의 추억이 또 하나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커다란 화분에서 나뭇잎 하나가 우리 테이블로 떨어졌다. 크리스티앙은 나뭇잎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더니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들었다. 처음에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신중하게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다. 그는 나뭇잎을 나에게 건네주었고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예기치 못한 한국어 레슨을 받았다면 나는 예상치 못한 낭만적인 편지를 받았다. 꾹꾹 눌러쓴 나뭇잎에는 'HAPPY NEW YEAR'이란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 우리의 마음이야."
그의 말에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때마침 생맥주가 나왔는데 우리는 '살룻(SALUD)'을 외치며 잔을 부딪혔다. 서로의 잔이 부딪히며 맥주 거품이 살짝 잔 위로 넘실거렸다. 나는 단 한 방울의 맥주도 놓칠 수 없어 서둘러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고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내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던 오늘 여정이 유난히 힘겹게 느껴졌다.파울로코엘료의 자전적 소설 '순례자'에서 파울로코엘료가 마스터에게 검을 받은 작은 마을 오세브로이로. 비록 그처럼 인생의 깨달음도, 검도 얻지 못했지만 내 옆에 있는 발렌시아 두 친구와의 맥주 한잔이 지친 하루를 소중한 추억으로 바꿔 놓았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각자의 오르막을 오르며 작은 행복을 공유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게 아닐까?'여기, 지금'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함께 오르막길을 걸으며 성장해나가고 있는 중인지도.
한 걸음 한 걸음, 다양한 사람들과 각각 매력이 있는 스페인의 크고 작은 마을. 발걸음은 무겁고 몸은 피곤하지만 이 길을 정말 잘 선택한 것 같다. 후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