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향한 따뜻한 시선
날씨가 더운 싱가포르의 집들은 개방적인 구조가 많다. 우리 가족이 살던 콘도도 그랬는데, 넓은 발코니가 실내 공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우리도 한동안 식탁을 발코니에 두어 야자수와 적도의 석양을 보며 야외식사 하는 기분을 즐겼다. 우재가 태어나면서는 발코니와 창가에 투명 그릴을 설치하여 아기가 밖으로 떨어지는 일을 막았다. 1층에 있는 집은 보통 발코니가 더욱 넓은 경우가 많았고 콘도 단지 정원과도 붙어있었다. 아마 사람들이 오가며 들여다보이는 단점을 보상해 주기 위한 성격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우리 콘도 1층에는 영국인 남편과 싱가포르 부인, 그리고 우재보다 한 두 살 많은 자매와 인도네시아에서 온 헬퍼가 살았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재택근무 시간이 많아진 우리는 평일에도 오가며 마주칠 일이 많았다. 영국인 남자는 발코니를 꾸미는 일에 진심이었는데 그렇게 멋지게 꾸민 공간에서 한낮에는 책도 읽고 저녁에는 사람들도 초청하여 파티도 자주 했다. 나와 아내는 마주칠 때마다 관례적인 목례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으며 서로의 아기가 나와있을 때면 아기의 나이를 묻는다든가 옷이 참 예쁘다거나 조금의 대화를 더 나눌 뿐이었다.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침식사를 마치고 난 아침 9시 무렵, 라니 이모는 우재를 유모차에 태우고 단지 내 산책을 나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둘만 나가는 것이 처음에는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었으나,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기도 할 것이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우재와 함께 바람을 쐬고 오는 것이 좋겠다 싶어 그러라고 했다. 그 이후로 거의 매일 우재는 이모와 즐거운 산책을 나갔다. 하루는 내가 오랜만에 사무실에 출근하러 나가는 시간이 그들의 산책시간과 겹쳤다. 내게 손짓하며 인사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니 우재와 이모 말고도 아랫집 꼬맹이들과 그쪽 이모도 함께 모여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이모의 이름도, 인도네시아에서 왔다는 것도, 곧 결혼을 할 것이라는 것도, 그 외에 시시콜콜한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전부 라니 이모를 통해 들었다. 아마 그쪽 가족도 마찬가지로 우리에 대해 들었으리라.
그렇게 라니 이모는 우재와 함께 계속 동네 친구들을 만들어갔다. 어느 날은 우재보다 어린 옆집 쌍둥이와 함께 바닷가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고, 우리 단지를 아름답게 가꿔주는 말레이 아저씨와 친해져 만날 때마다 암호를 주고받듯이 까꿍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라니 이모는 누가 이사를 가고 이사를 오는지 나보다 먼저 알아 내게 동네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이사를 온 사람에 대해서도 언제 그리 자세히 파악을 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우리 앞에서는 그렇게 말도 많지 않은 사람이 동네 사정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빠삭했다. 우리 부부가 몇 년을 살면서 알게 된 것보다 많은 것을 라니 이모는 알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는 라니 이모의 세심한 관찰력과 주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 것 같았다. 내가 아무 말하지 않아도 이모는 내가 어떤 사과를 먹고 어떤 사과는 먹지 않는지, 아내의 표정만 보고도 건강이나 기분 상태는 어떠한지, 우재가 좋아하는 자장가와 자는 자세는 무엇인지 항상 알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가듯이 한 말도 잊는 법이 없어 우리 가족에게 소소한 감동을 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딜 가나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람들의 호감을 받는 라니 이모를 통해 나도 많은 배움을 얻었다. 아기 우재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고 작은 불편과 성격상의 작은 잘못을 고치는 데까지도 이모가 참 많은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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