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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Shrimpy Aug 04. 2018

≪쇼코의 미소≫, 최은영

평생 가져가고 싶은 습관인 '필사'의 한 부분

책을 읽는 것도, 그 중 마음을 울리는 구절을 만나면 노트에 필사를 하는 것도, 내가 꾸준히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습관 중에 하나다.


다만 필사의 경우 해당 구절이 내게만 와닿는 부분일 수 있으니, 괜히 일기처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 있을 때 시간을 쪼개어서 하고 그 노트도 나만 아는 곳에 보관해왔다.


그러다 얼마 전 내가 마음을 연 사람이 조르고 졸라, 필사노트의 한 페이지를 못 이긴 척 + 용기를 내어서 보여줬다. 그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연관지어 얘기하며 정말 와닿는 구절이라 했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해주는 말에 기뻐했다. 그 순간 그 사람의 말은 진심이었겠지만, 시간이 흘러 결국 우리가 관계를 정리하게 된 직후 들었던 여러 부정적인 생각 중 하나는 '아, 일부분이지만 내 필사노트를 그런 사람에게 보여줬다니...' 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필사노트는, 뭐랄까, 나의 나름 내밀한 부분을 기록해둔 물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가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좋은 책에서 좋은 구절을 만나면 꼭 필사를 하고 있다.


특히 도서관 등에서 빌려서 다른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책이라면 필사의 즐거움은 더욱 커진다. 그 이유는

1. 브런치 첫 글에도 썼지만, 똑같은 책을 읽고도 한 귀퉁이를 접어 놓은 페이지나 밑줄 쳐놓은 부분이 다 다른 걸 보는 재미가 있고

2. 대출 기한이 있어 와닿는 구절을 만났을 때 적어둘 시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더워서인지 바빠서인지 유난히 필사노트에 손이 가지 않았고, 최근에 읽은 ≪쇼코의 미소≫는 결국 반납 기일을 넘기고 말았다. (늘 도서관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기다리면서 '왜 아직도 반납하지 않는 거야'라고 자주 투덜댔는데, 요즘의 나와 같은 대출자였을 수도 있겠거니 싶다.) 다가오는 월요일에는 책을 반납하고 다른 책을 대여하고 싶어서, 공개적인 공간이고 손글씨가 아니긴 하지만 브런치에나마 필사를 해두려고 한다. 참고로 ≪쇼코의 미소≫는 최은영 작가의  여러 단편들을 엮은 소설집이다.





·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


·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냐고 이야기하면서.


· 그 벤치에 앉아서 한지와 나는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내 이야기는 세상으로 퍼질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한지가 그 이야기들로 나를 판단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컸다.


· 나는 그곳에 가만히 앉아서 우리에게 그런 인종차별적인 말을 내뱉고 도망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 그 사람들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일 거고, (...) 외모나 나이, 환경, 혹은 누군가의 편견 때문에 차별받아본 기억이 있을 테고 사랑했던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되갚아주고 싶은 건가. (...) 나는 그런 식으로밖에 자신에 대해 안심하지 못하는 그들이 진심으로 가엾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차별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삶은 얼마나 공허한가.


· 시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렇게 내버려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작은 기억 하나도 제대로 잊지 못한다.


· (...)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히지 말라고 했다. (...)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 제3세계에서 초대받은 봉사자들이 시나브로 모두 제 나라로 돌아가서 콜롬비아와 파라과이에서 온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유럽 아이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몇몇 애들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차를 마시다가 훌쩍대기도 했다.

그 눈물에는 떠난 이들에 대한 감미로운 애정이 담겨 있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를 좋아했고 생활을 함께했다는 행복. (...) 그 눈물은 고독이 없었던 시간에 대한 애도였다.


·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길이니까.


· 지민이 울 때면 말자는 그 애와 같이 산보를 했다. 바깥공기도 쐬고, 변하는 풍경도 보고 하면 서러운 마음이 잦아든다는 것을 말자는 알았다. 말자는 지민이 서러움을 모르는 아이로 살기 바랐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 지민은 삶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 '지민아, (...) 너는 많이 우는 아가였지. 살며 너처럼 자주 우는 애는 못 봤다. 첨엔 나이 먹구 다시 딸네 애를 보는 게 억울혔어. 너가 빽빽 울 때마다 내가 뭔 죄로 널 떠맡게 된 건지 싶었잖여. (...) 근데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

할민 사람 좋아하는 게 무서웠다, 지민아. 사람 좋아하믄 맘이 아프구 힘들잖여. (...)

넌 궁금한 게 많은 아이였잖여. 할머니! (...) 개미들두 나처럼 이불 덮고 자? 하늘의 스위치는 누가 켜고 꺼서 아침이랑 밤이 와? 할민 그런 소릴 하는 너가 어디서 왔는지 신기혔었어. 너라는 애를 모르구 사십 년 넘게 살았었는데 그때 넌 어디 있었냐. 어디서 와서 이런 신기한 얘길 하는 거여. (...) 나의 아가야.'




첫 몇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는 이 책을 추천해 준 언니(내 독서메이트)는 내가 요즘 바쁘고 지치는 걸 알면서 왜 이렇게 소위 '기빨리는' 책을 추천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전 퇴근길에 마지막 단편 <비밀>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 혼날 뻔했다. 결국 그렁그렁한 눈물을 참으려고 천장을 보면서 집까지 겨우 걸어왔더랬지. 바쁘셨던 부모님 대신 할머니의 손에 자란 분이라면 꼭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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