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더헛 Mar 29. 2022

미운 예순 살의 불가사의한 행동


 사람들과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면 그 사람의 언행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을 종종 마주하고는 한다. 나같은 경우에는 이런 순간들을 대개 직장에서 접할 수 있었다. 수십 년을 나와는 다른 가치관이나 라이프스타일로 살아온 사람을 이해하기란 뛰어난 대문호의 머릿속을 상상하는 것보다 열 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우리 집에도 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왜 이러는지 그의 시선에서 바라보려고 애써도 결코 이해되지 않는 사람, 우리 집의 미운 예순 살이다. 


방 안에서 매트를 깔아놓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허리 스트레칭을 열심히 해주고 있던 어느 저녁, 아빠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서는 맥주 한 캔이 들려있었다. 평소 아빠가 내 방에 들어와서 무언가 물어보는 것은 드문 일이다. 주제는 거의 정해져 있다. "점심(혹은 저녁) 뭐 먹을래?" 그런 아빠가 들어와 내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


"요즘 허리는 어때?" 

"전보다는 많이 괜찮아졌어."


만족할 만큼 진전이 된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전에 비해서는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빠가 내 대답을 들으며 맥주캔을 땄고 순간 일이 벌어졌다. 

치이----타악. 푸쉬쉬쉬쉬쉬시------------ 

맥주를 칵테일 쉐이커처럼 흔들기라도 하면서 들고 온 건지 맥주캔을 따자마자 기다렸다는듯 맥주가 사정없이 분출되어 방바닥에 떨어졌다. 눈 깜짝할 새에 방바닥은 맥주로 도배가 되어 맥주웅덩이가 되어버렸다. 


"아, 뭐하는거야아아아아아아!!!!!!!" 


평화로운 스트레칭 시간이 예상치 못한 사건에 방해받게 되어 아빠에게 소리쳤다. 아빠가 웃었다. 무언가 실수를 하거나 사고를 친 후 겸연쩍어하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웃으며 아빠는 내방을 나갔다. 아니 도망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사람은 사라지고 사건의 현장만 남았다. 


"아빠 뭐야! 이거 치우고 가!" 


어이가 없어 올라온 짜증을 누르며 아빠에게 말했다. 


"네가 닦아. 그거 좀 흘렸다고." 


어쩜 저리도 당당한지. 아빠에게는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존재하기나 하는걸까. 기막히고 짜증은 나는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절로 나는, 내 머리로는 도저히 아빠의 머릿속을 헤아릴 수가 없는 이상한 상황이다. 아빠는 컴퓨터의자에 앉아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결국 난 스트레칭을 하다 말고 일어나서 걸레로 뒷수습을 해야 했다. 바닥에 흥건했던 맥주는 말끔히 치워졌지만 방안에는 진한 흑맥주 향기로 가득했고 그날 밤 난 마시지도 않은 맥주의 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다. 






아빠의 불가사의한 행동에는 그 나름의 패턴도 존재한다. 매주 일요일 아침, 아빠는 10시 즈음되면 턴테이블로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유튜브를 본다. 멜로디를 온전히 느껴야 좋을 클래식 음악과 사운드가 빠지면 섭할 유튜브 영상의 조합이라. 이쯤되면 궁금증이 생긴다. 아빠는 과연 무엇을 듣는걸까. 그 두 가지가 정말 동시에 들리는걸까. 아빠는 한쪽 귀로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다른 쪽 귀로는 유튜브를 듣는다고 했다. 아빠다운 기상천외한 답변이다. 여기에 가끔 아빠가 그 두 가지를 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숙면을 취하심으로써 화룡점정이 된다. 아빠의 숙면으로 인해 아름다운 클래식이 유튜브 소리에 어우러져 만들어진 시끄러운 소음을 듣는 건 자연스레 내 몫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클래식과 유튜브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 아빠의 행동들은 많지만 그중 유독 엄마를 짜증나게 하는 것이 있는데 양말이다. 퇴근 후 아빠는 양말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후 벗은 양말을 김치냉장고 위에 올려놓을 때가 있다. 김치냉장고 위에 둔다는 말도 웃긴데 김치냉장고 바로 옆에 다용도실 문이 있고 그 문 뒤에 빨래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어이가 없어 더 웃길 것이다. 한 발자국만 더 가서 손을 뻗으면 정해진 자리에 빨랫감을 던져놓을 수 있는데 굳이 엄마가 자주 여는 김치냉장고 위에 떡하니 올려놓는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엄마의 잔소리는 그리도 듣기 싫어하면서 잔소리 들을 행동만 골라서 하는 아빠를 보고 있으면 사람의 사춘기에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아빠의 시계는 중2에서 멈춰버린걸까. 


불가사의한 행동을 논하는 것이 꼭 양말 때문만은 아닌데 우리 아빠에게는 괴상한 습관이 있다. '떨어트린 물건은 줍지 않는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말 그대로다. 언젠가 아침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면서 출근 준비하는 아빠를 보고 있었다. 아빠는 행거에서 자켓을 꺼내다가 옷걸이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때 분명히 내 눈으로 목격했다. 몰랐다는 말은 안통할 것이다. 아빠는 옷을 꺼내려다 옷걸이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떨어진 옷걸이를 분명 쳐다보았다. 하지만 옷걸이를 줍지 않고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으로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한동안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남아있던 어느 주말 오후, 엄마는 아빠 옷이 걸려있는 행거에 옷을 걸어놓던 중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걸이를 집어들며 말했다. "네 아빠는 한번 바닥에 떨어진 물건은 도통 줍지를 않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그랬다. 내가 본 모습이 정확했다. 그럼으로써 아빠의 불가사의한 행동은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아빠를 바라보고 있자면 5060 세대 아버지들은 모두 우리 아빠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5060 세대 아버지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조금씩은 하고, 그래서 그 세대의 아버지 혹은 남편을 하나씩 보유하고 있는 어느 집이든 이런 알 수 없는 장면들이 종종 연출된다면 얼마나 웃길까. 만약 모든 5060 아버지들이 이러지 않는다면 우리 아빠는 가히 연구해 볼 만한 대상이다. 하지만 감히 단언해본다. 그 세대 아버지라면 어떤 식으로든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나씩은 하시리라.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취재해서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라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가끔 해볼 만큼 궁금하다. 5060 세대 아버지, 그는 누구이며 대체 왜 이러는걸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우리 아빠의 불가사의한 행동들을 눈앞에서 보거나 겪는 사람에게는 희극이 아니지만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에게는 희극이고 코미디일 수 있다.  그 당시의 일들을 글로 풀어놓거나 지인들에게 이야기로 전달하고 있는 나조차 짜증났던 감정은 잊혀지고 기가 막혀 웃음이 절로 나니 말이다. 물론 우리 아빠가 광대마냥 매일같이 웃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빠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빠의 행동을 놀림거리 삼아 엄마와 한바탕 배꼽잡고 웃는 일도 없었을거고 5분 전까지만 해도 혼자 열창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곯아떨어진 모습에 킥킥거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그리고 앞으로의 내 인생에 기분에 따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며 폭력성을 띠는 아빠가 없어지진 않겠지만 별난 행동으로 나에게 간헐적 웃음을 주는 아빠도 빼놓을 수 없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나중에 이 모든 풍경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봤을 때 어쩌면 그날의 나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고 그 행복에 아빠의 몫도 조금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아빠가 물려준 유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