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의 교훈
난치병 자율신경계 장애와 만성피로 증후군을 앓고 있는 존스홉킨스 소아정신과 지나영 교수가 '세상을 바꾸는 시간, 세바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 누가 나한테 "그럼 교수님 옛날 아프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나는 사양할겁니다.
제가 아프면서 배우고 깨닫고 성장한게 진짜 많아요. 』
나는 어떨까?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를 겪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돌아갈까?
돌아가고 싶다.
여기저기 여행다니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운동을 하고 그런 활동으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고 싶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난 또다시 내 건강과 젊음만을 믿고 여기저기 다니고 술 마시며 건강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채 나날을 보낼 것이다.
지금 이 시간들이 마냥 고통스럽기만 하지도 그렇다고 즐겁지만도 않기에 지나영 교수처럼 단언하여 말하지 못하겠다. 누군가 나에게 물어보면 확답을 하지 못한 채 마치 정말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너무나 진지하게 고민할 것 같다.
그럼에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시간들이 있음으로 인해 배우고 깨닫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1. 병을 극복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병상생활을 하며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병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병명의 허리디스크 목디스크라도 사람마다 몸상태나 디스크의 진행단계 그리고 통증을 느끼는 정도, 즉 감도의 차이가 모두 다르다. 똑같이 디스크가 터졌는데 어떤 사람은 응급실에 실려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참을 수 있는 정도의 통증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나같은 경우는 앉아있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통증을 느껴 MRI를 찍어보니 디스크가 터지지는 않은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유튜브에 디스크에 좋은 운동들이 지천으로 많이 올라와 있지만 모두가 나에게 맞는 운동은 아니다. 허리에 좋은 운동이라고 무작정 따라 했다가 허리가 망가지거나 디스크가 더 악화될 수 있다. 책, 동영상,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통증, 디스크 원인, 나의 디스크 진행 단계에 대한 알맞은 정보를 얻고 나에게 맞는 운동을 찾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2. 병도 멘탈 싸움이다.
디스크로 칩거가 시작되면서 정신이 가장 먼저 무너져내렸다. 몸상태에 따라 내 기분도 위아래로 파동이 일어났고 일희일비하게 되었다. 디스크가 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보존치료를 하던 중 몸의 전체적인 컨디션이 좋아지던 시기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올해 안에는 회복해서 내년부터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생각했다.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차있었다. 며칠 후 그런 생각을 했던 날 조롱하기라도 하듯 디스크로 인한 통증이 또다시 찾아왔고 기대했던 만큼 좌절도 컸다. 요즘 다니고 있는 한의원 의사선생님께 침을 맞고 한동안 좋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안좋아졌다고 몸이 왔다갔다 한다고 하소연했다. 선생님이 그러셨다. 사람의 몸이 기계가 아닌 이상 상향곡선을 그리며 좋아지기만 할 수 없다고. 파도가 치듯 몸의 컨디션도 상승과 하강이 되풀이된다고. 멘탈은 그 누가 대신 관리해주거나 키워주지 않는다. 오랜 기간을 싸워야 하거나 함께 가야 하는 병이라면 스스로 방법을 찾아 굳건하고 씩씩한 정신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3. 우울이 내 몸에 도움되는 것은 단 1%로도 없다.
우울해진 날에는 나의 우울이 엄마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나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 같다. 희한하게 우울하면 우울할수록 더 아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몸이 아프면 그 아픈 부위와 통증에 집중하게 되고 예민해지고 다시 우울해지고 우울은 옆사람에게 전파되고... 결국 악순환의 반복. 물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아픔을 떨쳐내고 밝게 웃어서 활기를 되찾아오는 건 손이 칼에 베였는데 웃는 것처럼 쉽지 않다. (그렇게 상상해보니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야외로 나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면 아직은 내 두발로 서있을 수 있고 살아있다는 것이 온몸의 감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감사함이 몰려온다. 그렇게 다시 나의 활기는 점차 돌아오기 시작하고 활기는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웃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길 뿐만 아니라 신기하게 통증이 줄어드는 것 같은 효과도 보게 되며 곧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낙관적인 사고도 갖게 된다. 웃어서 나쁜 점이 단 1%도 없다면 웃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4.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은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다.
일명 일상의 소중함이랄까. 상투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나. 정말 그렇게 느꼈는걸. 작고 소중했던 월급, 스트레스받고 거지같은 날들이 수두룩했던 직장, 이번 주말엔 뭐하지 하며 했던 행복한 고민,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 결정적으로 영원한줄 알았던 내 건강. 작지만 탄탄하게 내 세계를 받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빠져버리니 그 허탈함과 우울, 무기력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절망감은 찾아왔지만 그 안에서 적응하며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니 좋든 싫든 일할 수 있는 곳이 있고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는 과거의 사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당연하지 않은 건 또 있었다. 집 밖의 업무, 집안 살림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나까지 케어하는 엄마를 보며 엄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릇 그렇게 해야만 하는건 아닌데 말이다. 세상에 쉬운 역할이 어디 있겠냐마는 엄마라는 역할만큼 무겁고 힘에 겨운 역할이 또 있을까. 나는 오늘도 엄마를 1% 더 자세히 들여다본 것 같다.
5.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다.
재작년부터 세계적으로 확산된 코로나19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모든 일상과 산업들을 마비시켰지만 한편으로는 이점도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 여성들은 화장을 하지 않거나 화장의 몇 단계를 생략해서 편하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코로나로 인구이동이 제한되면서 대기오염이 줄어 히말라야 산맥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인류에게 위협을 가져다준 코로나19도 그 이면에는 이점들이 있다.
내게 디스크도 그렇다. 디스크는 내가 누리던 모든 일상을 빼앗아갔지만 그 대신 다른 것들을 내놓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엄마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할 수 있는 활동이 줄어들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쟁이까지는 아니지만 근무했을 때와 비교하면 감히 다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언가 '글'이라고 칭하기엔 쑥스럽지만 이 시간들을 기록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하나둘 올리고 있다. 식물에도 입문하게 되었다. 이것 또한 나를 격려하기 위함이다. 오로지 디스크에 집중했던 관심을 식물로 돌려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고 식물로부터 치유받게 되었다.
지나영 교수가 세바시 강연에서 이야기했던 미국 격언이다.
모든 일은 그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서 일어난다.
아직은 디스크가 원망스러운 때가 다반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디스크가 나에게 찾아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고 숙명이라면 이를 통해 내가 배우고 성장해나갈 수 있는 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건강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 가족과의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 이것을 피부로 깨달은 것보다 값진 교훈이 있을까. 난 오늘도 겸허히 디스크를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갈 삶의 태도와 방식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