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앨리스
Still Alice(USA, 2014)
가장 힘들었던건 이 가슴 아픈 영화와 글을 쓰기 위해 잠시 멀어지는 일이었다. 줄리안 무어의 연기와 담담하게 이어지는 서사와 공감하는 순간 누가 이 영화에 대해 슬픔 외의 감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깊은 영화가 던지는 메세지는 단순히 한 여자의 슬픈 인생과 가족을 통한 극복이 아니었기에 그저 최선을 다해 그녀와 그녀의 가족과 결부되어있는 나를 떼어 놓는데 힘을 다했다.
Still Alice??
껍데기만 남아있는 앨리스는 과연 여전히 앨리스일까?
만일 더 이상 자신을 정의하는 일이 불가능하고, 심지어 가족 또한 이전에 정의된 나와 현재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낀다면 그 사람을 아직도 앨리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녀는 배우고 배운것을 인지함으로 자신을 인지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때문에 인지 과정을 방해하는 이 병은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녀의 고통은 단순히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되는게 아니라,
학습된 것을 인지 못함. (과거)
새로 학습한 것을 인지 못함. (현재)
앞으로 학습할 것을 인지 못함. (미래)
그녀는 삼중으로 무언의 고통을 받고 있으며 또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잃었다는 것은 존재 유지의 이유를 잃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녀는 대답한다. no more Alice라고.
그러나 앨리스 본인의 대답과는 상관 없이 진행되는 서사 구조는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상 앨리스는 Still Alice라고 그녀와는 별개의 대답을 내놓는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의 갈등은 (여전히 앨리스 본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자기정리와 타자정리의 대립으로 확대되지만,
앨리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랑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인해 갈등은 맥없이 너무 뻔한 대답을 제시했다. 거기다 그것이 '위대한 ' 사랑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굳이' 말했기에 뭐라고 반대의 말을 꺼낼수도 없다.
영화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는 것은 좋은 행위가 아닐 지 모르지만,
훌륭하고 납득 할만하게 묘사된 앨리스의 자기부인 과정, 곧 더이상 앨리스가 아니다라는 답을 도출 해 내는 과정에 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still alice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과정은 '사랑' 한마디로 넘어가기엔 너무나 빈약하고 설득력 없었으며
더이상 자기 존재를 유지 할 수 없는 앨리스를 현실에 붙잡고 있는 것은 오히려 앨리스의 삶을 기만하는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내 눈엔 치약으로 거울의 자기 얼굴을 가리는 장면이 남아있는 앨리스의 조각, 즉 still alice가 느낀 치욕적인 감정의 흔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더라.
Still Alice가 말한다. 나는 No more Alice다.
삶엔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과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이야기로 설명 하기엔 극 이후 앨리스가 겪을 비극이 너무 크다.
오히려 비극적 서사(존엄사)로 그녀에게 평안한 영면을 안겨주는게 영화적 상상력의 배려, 그녀를 앨리스로 남게 하는 일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