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발렌타인
Blue Valentine(USA, 2010)
심리학자 존 브래드쇼는 저서 ‘내면아이 치유’에서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문제의 대부분이 수치심에서 비롯된다 주장한다. 이 수치심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존을 고갈시키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어떤 무결한 대상을 설정하는 것이다.
수치심, 즉 상처받음을 숨기기 위해 무결한 대상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우리는 어떤 무결한 대상을 설정하고, 그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자체만으로도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무결을 위한 헌신은 자기 비하를 전제하는데,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격하시키는 행동은 어떠한 경우에도 건강하다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신적 권위를 전제하지 않는 이상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가치도 무결하지 않다.
나는 지금 특별히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은 고결하지만 무결하지는 않다. 오히려 사랑의 흠을 인정할 때 우리는 그것의 고결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깨닫는 일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의 연애를 통해 깨달아야만 한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아직 사랑의 무결성을 믿고 있을 때의 흔적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 소위 ‘순정파’들은 여전히 사랑의 무결을 믿는다. 이들은 많은 경우, 특히 문학이나 미디어 작품에서 자주 순수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지만, 그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첫사랑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순정은 이미 없는 과거의 감정으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만 아름다웠던 것으로 추억할 수 있다. 이 순정이 지금 현재로 나타는 순간, 우리는 추억 속의 이 감정이 얼마나 병리적이고 이기적인지 알게 된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존 브래드쇼의 의견을 다시 빌리자면 어떤 사랑의 무결을 믿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믿음이 숭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어떤 사랑은 연인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며 또한 그 숭배되는 대상의 이상화 작업과 동시에 연인에 대비되는 자신의 초라함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 자기 비하는 상대방을 높일수록 따라 커진다.
이러한 병리적 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의 대상인 연인을 함께 망가뜨린다. 신디는 실제 자신의 모습과, 딘의 시선에서 이상화된 자신의 모습 사이에 존재하는 갭으로 인해 사랑의 당사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랑에서 소외당했다.
때문에 딘의 어떤 사랑은 불편하다.
딘은 무결한 사랑의 수호자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신디의 목을 졸랐다. 신디의 어떤 사랑이 문제없는 것은 아니지만(신디에 대해서는 또 언젠간 쓸지도 모른다.) 그녀는 딘의 사랑 안에서 희생당했다.
"나한테 맹세했잖아.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함께 하겠다고 말했잖아. 맹세했잖아.”라는 딘의 대사는 어찌보면 꽤나 소름끼치는 무서운 발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