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읽은 건 14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객기를 부린 거였다. 두 권 도합 800페이지 이상에 이르는 양장본을 고작 중학생 정도의 지식으로 읽으려 한 시도 자체가 객기였다. 물론 정말 억지로 다 읽긴 했지만, 말 그대로 글자를 읽는 것에만 성공했었다. 라틴어와 프랑스어와 영어와 독일어가 난립하는 참고 문헌 목록과 각주와 본문을 넘나들며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정말 좋아했다. 왜 좋아했냐고 묻는다면, 재밌었기 때문이다.
이해를 못 하는데 어떻게 재밌을 수 있냐? 라고 생각할 것이다. 솔직히 지금 다시 읽어도, 예전보단 훨씬 읽기 쉽고 이해하는 내용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온전히 다 받아들이진 못한다. 그럼에도 재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건 이 역사 서적이 취하고 있는 자세가, 각 나라 별 군주의 치세나 제도를 나열하거나 굵직한 사건들을 의미 없이 열거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중세 시대 일반 농노들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친 '일부' 사건들을 중심으로, 그 사건들이 각종 소규모 수도원과 마을과 성채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그 사소하다면 사소한 기록들과 함께 파헤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서기 800년대 경에, 유럽은 세 침략자들을 맞이한다. 바이킹, 사라센, 그리고 마자르. 이미 서기 800년 이전부터 바이킹은 유럽의 이곳저곳으로 약탈 및 정복 활동을 벌여왔고, 이는 곧 그들로 인한 참상과 전투와 봉건 계약에 대한 기록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동 시기 프랑스 수도원과 교회 연대기에 적힌 사건들을 토대로 대략 어느 시기부터 '노르망디'라는 공국의 기틀이 잡혔는지를 설명한다. 또 비슷한 시기 벌어진 '사라센'인, 즉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이슬람교도들의 사략질과 약탈이 끼친 영향 역시 설명한다. 그리고 지금의 헝가리 지역과 중부 유럽에 침입한 마자르 족이 신성 로마 제국과 그 주변 국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마찬가지로 수도원과 교회 연대기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커다란 개념보단 마을의 설립과 파괴, 봉건 계약서와 소위 충성 서약서, 그리고 해당 기록들에 쓰이는 어휘와 단어/표현의 변화에 집중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또한 당시 각 계층의 일상을 다룬 또 다른 '사소한' 기록들을 제시하며 지금은 여타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사실들을 설명하고 묘사한다. 이를테면 소위 탁발 수도승들이 얼마나 마을의 처녀와 유부녀들과 정분을 벌였는지 같은 얘기들을 말이다. 또 상세한 연대기가 남아 있는 어떤 소 영주의 일생을 얘기하며 귀족/기사 계급의 일상은 어땠는지도 얘기한다. 종사 생활, 기사 작위 수여, 토너먼트와 결혼, 영주로써의 치세와 행복한(?) 가정생활 등등을 말이다.
지금 이 글은 거의 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3년 전 기억에 의거해서 쓴 것이므로 사실 감상문이라 하기엔 하자가 많다. 그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이런 책이 있다, 관심 가면 한 번 읽어봐'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그냥 말하는 것보단 이렇게 쓰면 더 흥미가 가지 않을까 해서 써봤다. 그리고 사실 나도 저 부분들을 제외하면 기억에 남는 내용이 없다. 여기 쓴 내용이 책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던 걸 제외하면 말이다. 아무튼 이 글은 내 개인적인 기억을 토대로 쓴 글이니 그냥 그러려니 해줬으면 좋겠다. 혹시 틀린 부분이 있다면 댓글에 적어주길 바란다. 지루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