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읽은 소설 중 최고의 소설이었다. 이 책엔 정말 다양한 빛이 들어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빛깔은 쪽빛이었다. 크레타의 쪽빛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자습실에 앉아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눈앞에서 조르바가 살아 움직이며 크게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책만 읽지 말고 나가서 세상을 만끽하라고. 결과적으로 난 조르바 덕분에 인생을 마냥 즐기면서 살고 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동시에 추할 수 있다. 또 추한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
공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삶과 세상을 얼마나 즐기고 맛볼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다. 몇 년이 지난 이제서야 공부도 세상을 즐기는 방법에 속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여전히 공부보다 재밌는 게 너무나도 많다.
길을 걸으면 세상은 온갖 방식으로 내게 말을 걸고 자기 자신을 뽐낸다. 아삭 거리는 녹빛 나뭇잎, 팝콘 맛이 나는 구름, 매콤한 빨간불, 달콤한 초콜릿 같은 갈색 벽돌들, 텁텁한 맛이 나는 검은 자동차들. 색깔은 맛이 되고 맛은 음악이 되고, 음악은 냄새가 된다. 조르바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조르바는 세상을 견디는 법을 내게 가르쳐 줬다. 온갖 역겹고 더러운 인간 군상을 그저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법을. 가끔 그런 것들을 참을 수 없어질 땐 조르바의 말들을 떠올린다. 신에게 엿이나 처먹으라던 조르바, 악마도 신도 같은 게 아니냐던 조르바, 인간은 다른 인간의 피를 먹고 자란다던 조르바.
나는 한동안 조르바와 그의 말에 절벽 위에서 바다로 다이빙을 한 것처럼 푹 빠져버렸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도 빠져들었었다. 친구들과 밤새 게임을 하며 놀거나, 아니면 밤새 술을 마시거나, 혼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새벽에 신을 내서 글을 쓰거나. 문제는 내가 하던 짓이 결국엔 조르바가 후회하던 그것과 똑같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조르바가 소설 속 '나'에게 몇 번이고 했던 말처럼, 책만 들여다 봐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조르바를 알기 전의 나는 남들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알고 살아왔고, 조르바를 알고 난 후의 나는 조르바의 생각과 말을 나의 생각으로 알고 살아왔다. 어느 것 하나 결국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작가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이 글을 끝까지 읽은 여러분 중에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속는 셈 치고 한 번쯤은 훑어봤으면 좋겠다. 물론 이 책이 내게 준 충격과 영향은 오롯이 나의 것이지만, 이 글을 다 읽었다면 여러분도 그 영향의 티끌 정도는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