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옆에 있던 엄마는 하루 만에 너와의 영상통화 화면 안으로 옮겨갔다. 마술 같은 일이지. 아빠는 출근했다 퇴근하고는 엄마와 네가 없는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것이 전부인데, 엄마는 영상통화 화면 안의 너의 옆에서 웃고 있었다. 혼자 있어야 하는 처지는 너에게서 아빠로 바뀌었다. 너의 표정은 좀 더 밝아졌고, 아빠는 좀 더 바빠졌다. 엄마가 너에게로 가자마자, 아빠는 2주간 아침부터 저녁 또는 밤까지 진료하는 당직 일정을 소화해내야 했다. 그래서, 너를 깨우던 아침 영상통화도 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이면 아빠는 중산간 평화로를 달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주, 너에게 편지를 쓰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엄마는 너를 데리러 간 것이었지만, 계획은 바뀌었다. 너는 이번년도 말까지 학년 일정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는 너의 의견을 존중했고, 네가 돌아오는 시기는 겨울로 미루어졌다. 이번에 돌아오는 것은 방학인 셈이 되었다. 사실 시기가 조금 애매한 상황이었다. 네가 돌아오면 남은 초등 한 학기를 어느 학교에서 보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아빠도 너의 일정을 생각하면서 아빠의 병원을 만들어 보자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의 결정으로 한국에서의 초등학교 과정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 되었고, 아빠의 병원 준비도 진척 없이 제자리걸음 상태였는데, 왠지 여유가 생기는 듯한 기분이다. 오자마자 중학교 진학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다시 생기고, 그에 맞추어 아빠도 의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생긴다만, 우리는 미래의 계획에 그다지 익숙한 가족은 아니다. 지금 당장, 무엇이 최선이며 행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최선으로 꾸려나갈까를 고민하는 가족이었다.
돌이켜보면, 너를 그곳에 보낸 건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였지만, 아빠가 보기엔 너는 영어보다도 다른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운 모습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촌형제들과의 관계, 부모가 아닌 친척 어른들과의 관계, 그리고 한국과는 다른 학교 분위기와 그 안에서의 적응.. 아빠는 그런 너의 모습에 더 흡족하다. 너는 공부만이 아니라 공부 외의 많은 것들을 너무 훌륭하게 잘해 주었다. 아빠는 너의 미래를 위해 그곳을 보냈다. 하지만, 너는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을 배우면서, 당장의 무엇이 최선인지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잘 적응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 행복할 수 있다면, 너는 아주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것이다.
한 가지 보태는 이야기는, 너에게 주어지는 조건을 분명하게 파악하라는 점이다. 네가 원하는 것에 조건이 주어지면, 조건을 모두 채운 다음에 너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조건은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도 있지만, 서로 간의 대화로 조건을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을 협상이라고 한다. 대화를 통해 너에게 좀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 세상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기술이다. 그런데, 제시받은 조건을 네가 일방적으로 바꾸겠다는 건,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나아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태블릿을 사 달라고 했을 때, 아빠는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번째로는 태블릿 가격의 30%를 네가 용돈에서 충당할 것, 두번째로는 태블릿을 사기 전 그림 공부를 6개월 정도 할 것. 그런데, 너는 일방적으로 그림 공부를 따로 할지 안 할지는 네가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네가 조건을 무시하겠다 선언한 것이고 나아가 태블릿을 포기하겠다는 말이 된다. 네가 그 조건들이 부담스러웠다면, 엄마 아빠에게 그림 공부의 기간을 좀 줄여줄 수는 없겠냐는 제안으로 협상을 시작했어야 했다. 그것이 네가 좀 더 너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태블릿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너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조건들이 제시될 것이다. 그 조건들을 충실히 이행해 나가야만 네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자면, 조건을 충족시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때로는 조건을 너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협상을 해야 한다. 너는 조건을 일방적으로 바꿀 자격이 없다. 너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타인에게 조건을 거는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말이다.
엄마가 가고 나니, 텃밭에는 엄마가 거두어 먹겠다며 뿌린 루꼴라가 싹을 피우기 시작했다. 가지와 고추와 호박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살구는 다 거두었다. 이제 여기는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네가 오는 즈음엔, 장마가 한창이거나 조금 약해진 때이지 않을까 싶다. 여름에서 여름으로 오는 과정이 부담스럽지는 않겠지만, 집이란 어떤 상황에서든 그립고 포근한 곳이 되겠지.. 그런 집이었으면 한다. 잠깐 집을 떠나 있는 너의 입장에서 집이 당장 낯설 일은 없겠다만 말이다. 네 방을 서울 할아버지 할머니가 깔끔하게 정리해 두셨다. 네가 다시 돌아올 이 집을 아빠도 틈틈이 정리하고 손보아 두어야겠다. 네가 포근함을 느끼도록 말이다. 엄마 옆에서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