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제주엔 태풍이 너무 많이 온다. 집은 대체로 무사하지만, 비가 새던 이음새에서는 여전히 물이 떨어지고 있다. 아빠가 그럴까 봐 며칠 전 날이 좋을 때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실리콘을 좀 더 보강했었다. 그런데도 비가 샌다. 이전보다는 좀 덜 샌다는 데에 위안을 얻었을 뿐이다.
근무 조정을 해서 일찍 집에 들어왔다. 태풍이 제주 바로 옆을 지나는 시간이었다. 엄마와 저녁을 먹는데 문득, 아빠 옆의 네 자리가 허전했다. 네가 와서 그 자리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아졌다. 네가 영상통화에서 보았듯, 아빠는 술 몇 잔 했었고, 식사는 금방 끝났지. 비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지난 태풍들과는 달리 힘이 조금 약한 느낌이었고 그렇게 지나갔다. 이미 태풍에 익숙해진 생황을 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엄마와 아빠는 함께 영화 한 편을 보면서 그 시간을 보냈다.
너에게 쓰는 편지가 점점 쌓이면서, 아빠는 네게 이런저런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아빠가 아직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음을 생각하면,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는 것도 대화의 연장선에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너는 들었던 말을 다시 듣게 되면 짜증을 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것으로 생각의 능력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양해야 하고 깊어야 한다. 아빠가 말하는 공부란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네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깨달음과 경험 차원에서의 공부다. 그것이 평생 너의 마음가짐을 지배하고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너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운동 한 두 종목, 악기 하나, 그리고 독서를 통한 간접경험의 축적, 그리고 다른 언어로 표현되는 다른 세상의 말과 문화의 이해.. 그런 것들은 너의 삶 전체에서 너를 돋보이게 하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아빠는 네가 그런 사람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최근에는 말을 배우는 것과 여행하는 것에의 생각이 많아졌다. 위에서 말했듯,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다. 물론, 언어에의 깊이가 생기도록 꾸준히 배워야 한다. 네가 영문학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려워했지만, 그 어려운 단계를 넘는 일은 말속에 배인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게 됨을 뜻한다. 이번에 너는 역사과목에서 아주 좋은 점수를 얻었고, 그러면서 영국 역사가 매우 재밌다 말했다. 물론, 언어와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역사나 문화관계와는 다른 너의 흥미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영어를 좀 더 심도 있게 배우기 시작한 너의 이해력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생각의 방식이 바뀌는 일이다. 아빠는 그래서 다른 언어를 배우는 일에 열심이지 못했던 젊은 시절이 조금 아쉽다.
여행 역시 그렇다. 아빠가 살던 곳과는 말과 분위기가 다른 곳들을 보면서, 좀 더 깊게 들여다보고 이해해보고 싶은 곳들이 점점 많아진다. 가보고 싶은 곳 역시 많아진다. 그러나, 여행자는 언제나 겉핥기만 하고 마는 존재다. 사람이 생각을 키우는 데 여행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생각과 이해를 이끌어내는 데엔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다. 다만, 한 곳에서 충분히 오래도록 머물고 충분하게 스며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잠깐 머물며 즐기기만 하다 오는 여행이란 단지 기분전환의 수준이다. 아빠는 뒤늦게 시작한 여행이 그러한 수준에 머문다는 사실에 많이 아쉽고 슬프다.
아무래도 너는 그곳에서 공부하기 때문이라지만, 오래도록 진득하게 머물며 경험하는 여행을 하는 셈이다. 적어도 말레이시아가 어떤 곳이고, 그곳 사람들은 어떤 생각과 행동들을 하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이지 않더라도 너의 머릿속에 남을 것이다. 아빠보다도 그곳을 더 잘 아는 셈이지. 거기에 다른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에 딸린 여러 과목들을 배우고 있으니, 너는 아빠보다도 좀 더 다양하고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격으로 성장할 것이다. 거기에 네가 좀 더 너를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들을 갖춘다면, 너는 아빠가 부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제 본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이탈리아의 더운 여름날, 오래된 수영장의 모서리에 누워 하이데거를 읽으며 이해하려 애쓰다가 안되니까 그대로 굴러 수영장 물로 빠져들어간다. 물속에 서서 수영장 난간에 악보지를 들고 음악을 들으며 기보를 한다. 풍요와 여유는 단지 거머쥔 물질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노력하여 몸에 밴 것으로 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첫사랑에 큰 상처를 받은 주인공에게 아빠는 ‘그 상처와 슬픔을 잊지 말고 오래도록 기억하거라.’라고 조언한다. 위로와 함께 삶은 그런 경험으로 채워지는 것이라 조언한다. 네가 그런 사람이 되고, 아빠 역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너는 이미 그런 삶에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너는 그런 과정을 좀 더 심도 있게 나아갈 것이다. 차근하게 밟아가며 많은 생각으로 머리와 가슴을 채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