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데엔 약간의 도구들이 필요하다. 가장 기본은 연필과 공책과 지우개이다. 교과서를 제외한 모든 것을 도구라 생각한다면, 참고서나 연습장도 도구로서 필요할 것이다. 좀 더 다채롭게 공부를 즐기자면, 선이 가늘고 선명한 색색의 볼펜들이 필요하고, 밑줄 그을 때 쓸 자가 필요할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아빠 때엔 공학용 계산기까지는 사용해 보았다. 대학생 때 말이다. 대학생들에게 공부용으로 노트북을 보급하던 때가 아빠 대학생 때부터였다. 그 당시 두껍고 무거운 큼직한 노트북 하나에 지원금을 포함해서 삼백 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는 의대생이었는데, 의대 공부는 조금 원시적이다. 외워야 할 게 많았다.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할 건 거의 없었고, 리포트를 쓰는데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타이핑해서 출력하고 그렇게 제출했었다. 집에 있는 컴퓨터나 학교 컴퓨터실에서 작성해서 제출을 했었다. 그러니까 공부에 필요한 휴대용 전자기기는 예과 때 구입했던 공학용 계산기 정도였다.
세상은 많이 변해서 공부하는 데 활용되는 전자기기도 많아졌다. 노트북은 대학생들에게는 이젠 필수품이나 다름없고, 너희들 수업에서도 패드나 모바일 기기를 활용한 수업들도 많다. 너 역시 공학용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자계산기가 수업준비물에 기본으로 들어 있었다. 공부도 이제 문명의 이기를 충분히 활용하며 해 나가는 시대이다. 책만 보고 연습장에 끄적이면서 외우고 이해하던 아빠 세대와는 분명 풍경이 달라졌다.
사실 너에게 노트북 하나 장만해 줄 때가 머지않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는 문명의 이기에 너무 의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살면서 이미 기본이 된 것들이나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빠는 네가 노트북을 장만해달라고 말할 때, 나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는 적당한 디테일을 살려야 하는 문제이다. 예전에 아빠가 말했던, 일종의 딜(deal)인 것이다. 여기에 구체적으로 적지는 않겠다만, 네가 노트북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척 모호하다. 학교에서 준비하란 것도 아니고, 노트북을 이용해서 공부하겠다는 방법 역시 설명이 전혀 없다. 너는 노트북을 활용해서 네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한다만, 요즘 그림은 전자 펜슬을 사용해서 패드에 직접 그리거나, 신티크 같은 전문 도구에 그림을 그린다. 노트북으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건, 장난이 아니라면 디테일이나 그림 작업의 기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생각이다.
아빠는 노트북을 주로 글을 쓰고 사진을 관리하는 데 사용한다. 이 편지 역시 노트북으로 작성하고 너에게 보내고 있지. 글을 쓴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노트북이 현대의 생활과 공부에 많은 활용도를 지니고 있음을 공감하는 입장에서, 네가 노트북을 가진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너는 아직 노트북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너무 모호한 말만 내놓고 있다. 모호함이 가중되면 떼쓰는 모습으로만 보인다. 아빠는 말했다. 딜이란 논리를 가지고 상대를 설득하는 일이라고.. 논리와 설득을 통해 밀고 당기며 네가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일이다. 아빠는 너에게 완벽한 논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완벽한 논리를 말하기에 너는 아직 어리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떼쓰지 말고, 억지 부리지 않으면서, 네가 노트북이 필요한 이유를 논리적이고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네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다. 이 부분은 아마도 문자를 통해서 이루어지겠지.. 기다리고 있겠다.
지난주에 고구마를 캐고 생강을 캐고 땅콩을 거두었다. 너와 함께 고구마를 캐던 때가 생각이 났다. 내년엔 고구마를 거두는 자리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빠를 거들어 같이 캐든, 아니면 라이와 장난치며 마당에서 놀든 말이다. 엄마가 볶아 준 땅콩은 고소하고, 청으로 만든 생강차는 진했다. 네 입맛에 맞든 맞지 않든, 함께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엄마가 널 데리러 가겠지. 함께 돌아올 날이 멀지 않았음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