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52. 20191022

by 전영웅

아빠는 요즘 책 읽는 데 열중이다. 무슨 대단한 사명이나 큰 즐거움으로 읽는 것은 아니다. 사놓고 쌓인 책들을 어서 해결해야지 하는 의무감이 들어 읽는다. 아빠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즐거워하긴 하지만, 지금 거실 탁자에 쌓인 책들을 보고 있자면 한숨만 나온다. 어쩌자고 저리 많은 책을 샀을까 하는 자책이 든다. 맘에 드는 책을 고르고 그것을 구입하는 일은 잠깐이다. 그런데, 책 한 권을 읽는 일은 적어도 하루 이상이 걸리는 일이다. 요즘은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책부터 읽는다. 종일 책만 읽으며 소일하면 좋겠다만, 그럴 수 없음을 너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일은 중요하다. 그리고, 너에게는 이제 책을 읽는 일이 좀 더 중요해지는 시기가 다가온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살며 하게 되는 수많은 생각과 상상에의 재료를 저축하는 일이다. 때로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의 간접경험이 될 수도 있고, 네가 세우는 논리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아빠가 특정한 주제 없이 이런저런 책들을 마구 읽는 것을 공부의 의미로 치자면 잡학이라고 한다. 독서나 공부에 중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잡학의 독서는 오히려 생각의 밑바탕을 탄탄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너에겐 한 가지 독서보다는 다양한 독서가 필요할 것이다. 잡학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아빠 어릴 적엔 책을 읽는다는 일은 교과서나 참고서를 보는 것을 의미했다. 집안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그렇게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아빠 어릴 적의 독서환경은 너무도 황폐해서, 어디서 어떤 책을 사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빠가 너보다 조금 더 어릴 때, 책을 읽고 싶어서 찾아간 곳이 학교 앞 문방구였고, 문방구 아저씨한테 책을 읽고 싶은데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니 건네 준 책이 이승복의 이야기를 다룬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였다. 책 가격은 오백 원이었다.


책을 읽는 방법은 정독의 방법이 있고 통독의 방법이 있다. 한 책을 집중해서 여러 번 읽는 깊이에의 독서가 있고, 여러 책을 두루 섭렵해서 읽는 다독의 독서가 있다. 정독이란 차분하고 천천히 의미를 음미하면서 읽는 방법이고, 통독은 조금 빠르게 읽으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맥락을 놓치지 않는 정도로 읽는 방법이다. 간단히 구분하자면 철학이나 사상서는 정독으로 읽게 되고, 소설이나 에세이는 통독으로 읽어도 무방한 장르이다. 정독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집중해서 읽게 되니 깊이에의 독서가 될 것이고, 통독을 하다 보면 다른 책에도 관심이 가게 되니 다독을 하게 되겠지. 두 방법 중에 무엇이 더 낫거나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독서도, 경우에 따라 방법이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독서를 하는 아빠는 통독과 다독이 주를 이룬다. 아빠의 독서의 문제는 정독과 반복의 독서를 거의 해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빠 어릴 적의 황량했던 독서환경과, 성장하면서 그렇게 책을 읽을 만한 환경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고들며 읽었던 것이라고는 교과서와 의학서적, 그리고 참고서와 족보라 불리는 의대 참고자료들 뿐이었다. 생각이 깊이가 만들어지지 않고, 생각을 설명할 수 있는 기본 자료들이 형성되지 않으니, 아빠의 글이나 생각은 쉽게 공감을 얻지 못한다. 어쩌면 독서는 인생의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져야 할 일종의 훈련인지 모른다. 생각의 깊이를 만들고 자료를 축적하는 일은 늦을수록 어려운 일이구나 아빠는 요즘 자주 깨닫는다.


글자보다는 영상이 더 익숙한 너희들에게 독서는 좀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요즘은 영상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대이니 접근하기도 책보다는 훨씬 나아 보이는 시대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역사에서 글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반면, 화면 안의 영상은 겨우 수십 년 전에 시작된 일임을 생각해라. 인간의 삶은 아직은 글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고, 영상보다는 좀 더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수단과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저장된다. 아빠의 모습이 온전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만, 너에게 많이 옮겨가길 바란다. 독서습관은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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