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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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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Feb 18. 2024

2024년의 텃밭일기 : 0218

  그저 그런 날들의 연속이다.  아무렇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날들의 연속..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날들은 한 때 내가 바랐던 행복이다.  그럼에도 돌이켜 바라보는 마음에 주저없이 지루함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는 나는 참 간교한 사람이다.  기쁜 날은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가다 결국 만나거나, 매우 우연한 기회로 만난다.  그것도 잠깐의 순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힘든 날은 그것 그대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어서 지나가길 바라며 시간의 느린 흐름에 버거워한다.  그러니, 인간은 지루할 정도의 평범한 날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그저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간교함은 아무렇지 않게 돋아나는 저 텃밭의 잡초들처럼, 평범한 날들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를 묵직한 무채색으로 물들여 버린다. 


  한두 번의 추위가 지나간 것 말고는 견딜만한 온도의 변화를 겪으며 텃밭 역시 그저 그런 날들을 보냈다.  텃밭은 알아서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속에 월동무는 나름의 둥치를 키워가다 봄을 준비하고 있다.  루꼴라는 산발하는 이파리들 사이에서 꽃대가 하나둘 올라오고 있다.  쪽파는 나지막한 키로 바람을 견디며 겨울을 보냈다.  봄이 가까워지는지 캐모마일과 광대나물이 텃밭을 뒤덮으며 자라고 있었다.  텃밭은 알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두어 번 산발한 루꼴라의 이파리를 잘라 먹은 일과, 산발 사이에서 올라오는 꽃대를 가끔 잘라준 일이 전부였다.  텃밭 가장자리에서 가까운 루꼴라만, 나의 손과 발길을 접했다.  나는 텃밭에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갈 일을 만들지 않았다.  텃밭은 주인의 손길과 발소리 없이, 알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텃밭의 느리고 작은 변화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은 정적에 가깝다.  출근 전, 라이의 밥과 물을 챙겨주고 밤새 마당 한 켠에 눈 배설물을 치워준 뒤에 잠시 레몬나무 옆에 서서 텃밭을 바라본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은 없다.  느끼지 못할 만큼의 작은 변화들이 모여 텃밭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알아챌 뿐이다.  빈 공간들과 자리를 차지한 월동작물들을 눈으로 살피는 순간은,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는다.  출근을 위해 분주했던 방금 전의 시간과 차에 들어서며 시작되는 앞으로의 일들 사이에서, 나는 잠시 몸을 멈추고 시선을 텃밭에 둔다.  피부로는 아침 서늘한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오로지 시선만을 움직여 그 작은 공간을 바라본다.  저 평온함을 닮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시끄러운 속마음과, 갈등과 계산이 뒤섞여 뭉친 시간들과, 일어나지도 않은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미련한 걱정들까지 더한 번잡함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친다.  그러다보면 들이마시는 숨이 크게 부풀고, 작은 코를 비집어 나오는 날숨의 소리가 살짝 거칠어진다.  더 이상의 미련을 만들고 싶지 않아 얼른 몸을 돌려 차에 오른다. 


  나는 정말 지루했을까?  별 일 없이 지내온 근 한 달간의 근황은 앞서 말한 대로 다행이자 별 느낌없는 행복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아니 못했다.  속마음은 미련을 안은 채 버둥댔다.  아무 일 없었던 시간과 몸뚱아리 속에서, 시끄럽고 번잡한 무언가가 요동치며 보이지 않게 나를 짓찧었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그리고 길거나 짧은 간격으로 삶의 방향성을 힘겹게 잡아가야 했다.  작은 변화들이 모여 조금씩 달라지는 저 텃밭 역시, 알고보면 치열한 경쟁과 엄청난 크기의 생존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하는 버둥거림은 어떤 존재에게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수단이다.  피할 수 없이 마음의 손에 쥐어야만 하는 삶의 수단에, 나도 텃밭도 지루할 수는 없는 일인 셈이다.  그러니 버텨내는 일에 열심이어야 한다.  끝을 알 수 없는 버팀과 열심은 별 느낌없는 행복이기도, 답답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지루함으로 다시 이어진다.  산다는 것의 피할 수 없는 순환의 업, 그러니 여기까지 적어내려간 말들은 대체 무슨 의미인 것일까..

  무언가를 꾸준히 하다보면 만나게 되는 즐거움, 또는 우연한 기회에 마주하는 기쁨을 살짝 기대한다.  이제 곧 들어설 봄에는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에 애써 의미를 부여한다.  봄이면, 꾸준한 무언가를 텃밭에서 이어야 한다.  몸이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힘든 몸은 봄날의 별 일 없는 날들의 필수조건이다.  이런 의미없는 상념으로 끄적거리는 텃밭일기가 아닌, 몸을 움직였다는 기록으로 별 일 없는 봄날의 텃밭일기를 적어나갈 것이다.  속시끄러운 날들을 텃밭에서 버텨내고 있다는 고요한 치열함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즐거움과 기쁨은 그렇게 만들어질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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