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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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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Jan 15. 2024

2024년의 텃밭일기 : 0115

  농한기를 잘 보내겠다는 말은 시작부터 공염불이 되어버렸다.  지난 텃밭일기를 그렇게 쓰자마자, 일요일 오후에 할 일이 없어 그냥 톱과 전정가위를 들고 마당으로 나선 것이다.  전정을 시작했다.  과감하게 쳐냈다.  수형을 잡을 줄 몰라서, 일단 굵은 줄기만 남기고 잔가지들을 쳐냈다.  모양이 별로일 듯 싶은 굵은 가지들도 쳐냈다.  두릅은 키높이 정도로 모두 잘라냈다.  순을 딸 때나 반가운 녀석들, 봄이 아니면 따가운 가시와 미친 번식력에 잠시의 반가움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과감하게 쳐낸 가지들을 뒤뜰어 모으니 다시 산더미가 되었다.  이것들은 언제 태워 없애나 싶은 숙제가 된다.  일단은 겨울바람에 말려야 한다. 


  뒤늦게 시험삼아 파종한 일본 무들은 예상대로 자라지 않았다.  새싹만 올리더니 찬바람에 겨우 버티다 이내 시들어버렸다.  제때 심은 무들은 찬바람을 맞아가며 둥치가 조금씩 굵어졌다.  배추의 속이 차올랐고, 대파는 찬바람을 타고 줄기를 올렸다.  루꼴라가 무성했다.  이렇게 찬바람을 좋아하는 녀석들이었나 싶을 정도로, 찬바람에 긴 생머리 난장이듯 무성해졌다.  이파리를 한 움큼 잡고 잘라 씻어서 먹어보니 찬바람에 속에 든 맛은 짙은 알싸함이었다.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텃밭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하얀 텃밭, 사이사이로 검게 드러난 검은 돌, 그 색의 대비와, 생기를 잃지 않은 올리브와 월계수 나무의 이파리들, 그리고 낮게 눈이 얹힌 무 이파리들.. 이 모습은 제주가 아니면 보기 힘든 서정이다.  눈이 내리는 겨울과, 겨울을 이겨내는 땅에 뿌리를 박은 것들의 대조..  그리고 그 서정을 잠시 눈으로만 감상하다가 이내 출근해야 하는 나의 현실..  인간은 눈이 쌓인 길을 어떻게든 뚫고 나가 일터로 향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문명을 만든 노력이기도 했지만, 일구어낸 문명이 인간을 정말 행복하게 만들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고된 노동일 뿐일 수도 있다.  당장의 시야에 펼쳐진 눈덮인 서정을 이내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감성과 감정의 여유따위는 일단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마음을 메말린다.  한여름의 폭우와 가을의 폭풍, 그리고 겨울의 폭설에 아랑곳하지 않고 매번 하던 일을 계속 해야하는 현실은 결과적으로 누구를 위한 현실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 필요 이상의 부를 축적했으면서도 분배에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피할 수 없이 모두가 겪어야만 하는 자연재난은, 필요 이상의 부를 축적한 시스템에 커다란 원인이 있음은, 이제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쌓인 눈은 하루이틀 새에 바로 녹아버리고, 그것은 그대로 땅에 스며들어 월동하는 작물들이 얼거나 시들지 않을 수 있는 동력이 된다.  눈을 녹인 애매한 온기는 한겨울에도 잡초들이 자라게 한다.  누런 잔디들 사이로 푸르게 남은 것들 거의 모두가 잡초이다.  겨울을 나는 오레가노와 부추를 제외하면 그렇다.  골갱이로 캐낼 수 없는 잔디 비스무레한 녀석들을 제외하고는, 나는 잠시 쪼그려 앉아 손에 잡히는 녀석들을 열심히 뽑아 냈다.  결국 겨울의 농한기란 여기서는 존재하지 않음을 무의식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따라서 농한기는 노력해서 즐기고 활용해야 한다.  내가 애써 시선을 거두어야만 온전한 농한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집 주변을 쪼그리고 앉아 빙 돌아가며 잡초들을 뽑았다.  한겨울에도 양껏 퍼진 잡초들을 뽑고 나서는, 골갱이로 관리가 되지 않는 녀석들은 예초기를 돌렸다.  한겨울 예초기라니, 일을 애써 만든 것인가 싶기도 할 만큼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당일을 줄이고 글을 쓰는데 좀 더 집중하고 있다.  추워지니 자전거에도 소원해졌고, 마당일도 줄어드니 몸은 그만큼 불고 있다.  불어난 몸은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적신호를 보내는지라, 나는 일부러 식사량을 줄이면서 체중관리에 신경을 쓰는 중이다.  어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봄이 왔으면 하지만, 한겨울에도 자전거로 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 바램도 핑계일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든 일에는 장단이 있고,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는 법이다.  온기가 있는 서재에 가만히 앉아 글을 쓰는 만큼, 몸에는 지방이 쌓이니 말이다.  


  폐자재를 모으고 있다.  올해 봄에는 텃밭을 완전하게 바꿀 생각이다.  잡초매트를 깔고, 틀을 세워 쿠바식 틀밭을 만들 생각이다.  세울 틀로 쓸 자재들을 구하는 것이다.  벽돌도 좋고 뭐가 되든 좋지만, 나무로 틀을 만들면 어떨까 싶어 폐자재를 모으는 것이다.  3월이 되면 천천히 땅을 모두 뒤집을 것이고, 구획을 만들어 흙을 모으고, 구획 바깥은 매트를 깔고 구획은 틀로 테두리를 만들어 흙을 채우는 구상이다.  틀 안은 다시 멀칭을 하고 말이다.  관리가 좀 더 편리해지지 않을까 싶어 구상하고 있지만, 이 역시 해 봐야 하는 일이다.  어디서 어떤 문제가 생길 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게으른 방치농법은 이제 불가능하다.  방치를 하려면 그만큼의 준비가 필요해졌다.  그 준비 때문에도 이번 농한기는 온전히 쉬기는 틀린 듯 하다.  아니, 농한기를 말하고 바란 것 자체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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