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편한 날들이다. 텃밭은 출근 때에 잠시 바라보는 공간이 되었다. 심어놓은 것들은 알아서 자라고 있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서 잠시 물을 몇 번 뿌려주긴 했다. 공기가 좀 차가워진다 싶으면 새벽 이슬이 땅을 적시니, 물을 뿌리는 일도 점점 심드렁해진다. 해가 높지 않으니, 옆집의 그림자가 길어서 심어진 것들이 해를 잘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심겨진 자리에서 점점 이파리를 늘리고, 덩치를 키운다. 바라보는 일은 미세하게 변하는 그런 모습을 관찰하는 일이다.
올해 가을은 태풍이 없었다. 날이 서늘해지며 가을이려나 싶더니 갑자기 추워지며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이 좀 이르게 찾아온다 싶더니 다시 따뜻해지며 가을도 겨울도 아닌 어중간한 날들이 이어졌다. 한라산에는 상고대가 보이고 중턱까지 눈이 쌓이는 날이 있다가도 어느새 정상부근까지 눈이 모두 녹아 푸른 햇살에 검푸른 모습을 되찾곤 했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았다. 오더라도 감질나는 수준이었고, 급격한 온도변화에 제주에선 보기 힘든 우박이 두어 번 떨어졌다. 날씨가 이상해진 건 분명했다. 올해는 그 이상함이 피부에 직접 체감되었다. 모두가 기후변화를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더 자주 언급하고 있었다. 이상한 날씨 덕에 올해 감귤은 맛이 역대급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아 병원도 날씨에 어느정도 영향을 받는데, 올해는 사람들이 전부 감귤 수확에 매달리는지, 물리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몇 평짜리 텃밭이 그런 이상기후에 대단한 영향을 받을 일은 없다. 여름의 폭염에 시달리던 것들은 모두 거두어졌다. 다만, 급격한 온도변화에 이파리나 줄기 끝이 조금 시들고, 평균적으로 높은 온도에 때아니게 무성해지는 것들이 보인다. 그래도 한 가지 이상기후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 한 번 발생하긴 했다. 어느날 밤, 급격한 기온하강에 바람이 태풍급으로 부는 밤이 있었다. 그 바람에 텃밭 가장자리의 석류나무가 쓰러졌다. 세울까 했지만, 이전에 한 번 쓰러진 전적이 있었고, 그 때 다친 뿌리가 여전히 온전치 못한 모습을 보고 거두기로 결심했다. 내 키보다 조금 큰 나무라서 드러난 뿌리를 캔 다음 들어내었다. 둥치를 톱으로 잘라 뒤뜰로 옮겼다. 석류를 둘러싼 철쭉도 모두 캐내었다. 손이 잘 가지 않으니 옆으로 줄기가 퍼지면서 텃밭공간을 차지하기만 했고, 담벼락을 따라 자라는 잡초덩굴들의 좋은 자리가 될 뿐이었다. 정리를 하고 나니, 텃밭이 한결 넓어졌다.
일본에 다녀온 지인이 무 씨앗을 선물해주셨다. 잘은 모르지만 다이콘이라는 단무지 무와, 둥글고 예쁘게 자라는 작은 품종의 무 두 가지였다. 사진의 무 모습이 예뻐보여서 구입했다는데, 정작 빌라에 사시는 본인들은 심을 곳이 없어 고민하다가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었다. 뒷면 설명에 나오는 그래프로 보아 파종시기가 우리나라 무와 거의 비슷했는데, 선물받은 시점은 파종시기에서 많이 늦은 때였다. 그럼에도, 날이 아직은 많이 춥지 않으니 시험삼아 심어보자 싶었다. 낡은 멀칭을 뜯어내고 이랑을 하나 만들고 반을 나누어 무를 파종했다. 역시나 쉽지 않았다. 2주를 기다리니 싹이 겨우 올라오는 정도였다. 남은 씨앗은 내년에 파종해야 할 듯 싶다.
겨울무가 잘 자라기는 하는데, 그늘지고 비가 없어서인지 예년보다 크지 않다. 농어를 한 마리 잡아 회를 뜨고 서더리를 남겼는데, 지리나 매운탕을 끓이는데 넣자니 제일 크게 자란 무도 아직은 아쉬운 수준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루꼴라가 무성하게 자랐다. 열심히 뜯어먹어야 하는데, 요즘 그러지를 못한다. 배추는 역시 벌레들의 은신처로 남았다. 쌈배추라 그래도 건질 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냥 소중한 생명들의 공간으로 그대로 둘까 싶다. 쪽파들도 그닥 잘 자라지 못한다. 이파리 끝이 누렇다. 텃밭 바닥을 점점 뒤덮는, 캐모마일 싹과 다른 겨울잡초 싹들이 쪽파를 위협하고 있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 오히려, 한 쪽에 우연히 자라 이파리를 넓게 편 적갓에 눈길이 더 간다. 갓김치가 생각나고, 갓을 넣은 김장김치가 생각난다. 귤나무에는 귤이 진한 주황색으로 여럿 매달려 있다. 곧 따줘야 하는데, 몸을 놓아버리니 이마저도 귀찮다. 올리브가 무성하게 달렸는데, 기름을 짜 보겠다고 몇 개 거두어 시도해 본 아내는 실패 후 마음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올리브는 바람이 불 때마다 마당으로 후두둑 떨어지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 나는 마음을 내려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귀찮은 것인지 모르겠다. 텃밭과 마당의 나무들도 전정을 해주고 정리를 해야 하는데, 언제나 할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몸이 편하다고 마음마저 이렇게 내려두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이미 다른 일들을 신경쓰며 시간을 채우고 있다. 몸이 쉬는 날에는 텃밭에의 마음도 내려놓고 있지만, 다른 일들에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다. 마음의 이동 또는 적절하고 유연한 배분이라고 해야 할까? 병원은 연말이라고 무척 바빠졌고, 되든 안되든 주제를 정해두고 글을 쓰느라 마음이 번잡하다. 텃밭을 떠난 몸과 마음은 다른 곳에서 분주하다. 그러니, 나의 게으름은 변명의 여지가 있다.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고 텃밭이 잡초로 한겨울 푸르러져도, 나는 나의 농한기를 잘 활용하며 보낼 것이다. 톱과 전정가위를 들고 마당으로 나가는 날이 생긴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