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이 May 08. 2024

정체성 팔기

도널드 E. 밀러 , 『무기가 되는 스토리』

이 책에서 가장 의외였던 부분은, 고객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전환’을 촉구하라는 내용이었다. 여정의 단계별로 고객의 우려를 불식시켜서 구매까지 끌어와야 한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전환을 촉구하는 부분은 항상 조심스러웠다. 구매에 확신이 없는 유저에게 자꾸 사라고 들이밀면 짜증이 난 유저가 이탈하지 않을까 염려가 됐다.



하지만 외부 자극이 없으면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당장 나만 해도 관성의 동물이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결정을 미루는 일이 잦다. 게다가 우리 회사의 서비스는 취미와 관련된 것이어서, 언젠가 하면 좋겠지만 굳이 지금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다보니 크리스마스와 같은 이벤트와 관련된 시기에만 매출이 높아지는 편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고객들에게 이걸 하면 뭐가 좋아진다라고 비전을 제시하고 행복을 약속해야 할테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는 ‘뭐가 좋아진다’에서 ‘뭐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합의된 부분이 없다. 우리의 고객들은 ‘기분 전환’이나 ‘식상한 놀 거리의 대안’ 정도를 찾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서비스의 경쟁자가 너무너무너무 많다. 다른 대안을 제치고 우리만을 선택해줄 충성 고객군이 없다. 재미와 학습이 결합되어 있는 서비스의 특징을 잘 살리면 감도가 높은 고객군을 만들 수 있을텐데, 그걸 못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아쉽다.


이런 점에서 고객의 내적 문제와 철학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책의 제안이 흥미로웠다. 특히 철학적 문제의 경우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철학적 문제에 대한 솔루션이야말로 브랜드의 스토리를 강력하게 만드는 한 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솔루션을 선택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외적 문제와 내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이 회사의 고객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설득되지 않을 수 있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다른 대안도 많기 때문이다. 철학적 문제를 풀어줘야만 거기에 공감하는, 응집력 있는 고객들을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소비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생각이 조금 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기업이 파는 이미지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거부감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소비야말로 사람을 바꾸는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사 읽은 것도 소비이고, 전시나 공연을 보는 것도 소비이고, 새로운 음식을 즐기면서 문화를 체험해보는 것도 소비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팔 수 있고 또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정체성을 팔 수 있다면 제품의 쓸모는 부차적이라는 책의 제언이 옳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플랫폼답게 플랫폼 만들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