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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 사는 로젠 Dec 06. 2023

06_문소리 배우의 사인

ㅣ부산행 야간버스ㅣ

 

    우리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만나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나 10월 초가 되었다. 여느 때처럼 지하철을 같이 타고 돌아가는 시간, 무슨 얘기를 듣다 말고 멀더는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안내 팸플릿을 꺼내 들었다. 근무하는 신문사에서 얻는 것이다. 그가 지하철 안에서 굳이 그 두꺼운 영화제 팸플릿을 꺼낸 이유는 그야말로 나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임'상수 감독 영화 <바람난 가족>이 부국(BIFF)에서 개봉을 앞두고 있었는데, 내가 감독을 '홍'상수라고 말했다. 감독 이름을 ‘잘못’ 말한 것이다. 이때다 싶은 제이슨은 자신의 말보다 더 강력한 영화 안내 팸플릿을 내 코앞으로 들이민 것이다. 그런데 영화제 팸플릿을 본 나는 내가 감독 이름을 잘못 말한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 상영 목록에 기분이 들떴다. 멀더는 내릴 문이 열리자, 자신이 오류를 지적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팸플릿을 거의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잠시 열려있는 문 앞에서 배낭에 다시 팸플릿을 넣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 빌려달라고 하면 없어 보이겠지' 하던 나는 그 다음 주말에 멀더와 함께 부산행 야간 버스에 올랐다.  

   나는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신문사에서 일하는 친구들 틈에 끼어서 프리패스 카드를 목에 걸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영화를 골라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근사한 계획을 가지고 출발하였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은 그렇게 쉽게 전개되지 않았다. 당장 저녁에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났을 때부터 피로감을 느꼈다. 멀더가 인턴으로 일하는 신문사에서 가깝게 지낸다는 한국인 동료와 같이, 그러니까 3명이 함께 부산으로 가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그 동료가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되었다는 것. 고속터미널에서 우리는 처음 봤는데, 멀더가 나를 뭐라고 얘기했는지 뭔가 나에게 상활을 자세히 설명하지도 않았다. 나한테 멀더를 맡기고 영화제에 가서 김아무개를 찾으세요 하고는 가 버렸다. 맙소사. 영어 초급자인 내가 한국어를 못하는 이방인을 데리고 나도 잘 모르는 부산에 가서, 국제 영화제 방문을 무사히 마쳐야 하는 것이었다. 셋이면 멀더는 영어를 잘하는 동료랑 둘이 붙어다니고 나는 적당히 떨어져 다니며 잠시 서울을 탈출하는 기분을 만끽하려 했으나...기다란 다리를 어찌할 줄을 모르고 몸을 걸친듯 앉은 멀더는 보기만 해도 불편했다.      


 ㅣ문소리 배우님 팬입니다.ㅣ                           


    원래 가을 아침 햇살은 따가운 법이어서 올려다보니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야간 고속버스는 처음이라 잠은 거의 못 잤고, 길을 몰라도 군중에 떠밀려서 자동적으로 찾을 수 있었던 영화제가 열리는 곳은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아침밥을 먹여야 하는데...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은 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알려준 국밥집으로 갔는데,  허름하다 못해 금방 쓰러질 것 같은 그 국밥집만이 자리가 있었다. 무려 2천5백 원짜리 국밥. 생각해 보면 지금은 찾아도 없을 낭만이긴 하다. 콩나물만 잔뜩 들어있던 국밥을 멀더는 맛있다고 먹었다. 게다가 그는 가만히 국밥을 들여다보더니 “.. 고기.. 가” 있단다. 2천오백원짜리 국밥에 고기가 있다고?  그러고 보니 콩알만 한 고깃덩어리가 몇 개 있었다. 이것은 대체 무슨 국이란 말인가... 나는 내 국밥의 콩나물을 뒤져서 정체 모를 콩알 덩어리는 다 건져주었다.  내가 고깃덩어리를 건져서 넘겨주니 소중한 것을 받아서 맛을 음미해 가며 먹었다. 이렇게 적응을 잘하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표를 사기 위한 긴 대기줄을 보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하고 중얼거리니 멀더가 '그럴 줄 알았어'라고 한국말로 받는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현이 결코 쉽지 않은 말인데 저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걸 보니 매일 듣는 말인가 보다. 염상섭만큼 강렬한 발음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같은 한국 사람으로 느껴지는 말투였다. 대체 그의 생활에 밀착해 있어 이 외국인의 한국어 발음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중년의 아저씨는 누굴까...

     우리는 표를 각자 구입하고 메가박스 안 커피숍에 앉아 쉬기로 했다. 나는 잠시 눈을 붙일 건데 너는? 책을 읽는단다. 어련하시겠어. 나는 잘란다. 겉옷을 뒤집어쓴 나는 금방 잠들었다. 그 짧고 달콤한 잠을 누가 내 발을 툭툭 차면서 깨웠다. 나는 멀더가 치는 것을 알고 옷을 뒤집어쓴 채 놔두라고 발을 뺐으나 다시 발로 차는 것이다. '네가 감히 스승님의 잠을 깨우냐?'는 표정으로 옷을 확 제쳤는데, 멀더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란다. 뭔데? 헉... 이게 무슨 일이고... 

    우리 테이블 옆에 문 소리 배우가 앉아 있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영화 <바람난 가족들>에 나오는 배우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었고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와 멀더는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먼저 앉아 있었고 나가야 되는 것도 아닌데 대체 나를 왜 깨운 거야? 그런데 다시 발로 내 발을 친다. '이 눔의 자식이 열 살이나 많은 스승님과 커뮤니케이션을 발로 하다니...'

   나는 멀더의 설렘을 알고 있었다. 나를 만날 때부터 <오아시스> 영화 얘기를 했다. 조금 보태서 백번은 했다. 그가 흠뻑 빠졌던 영화 <오아시스>의 주인공 문소리 배우가 바로 나의 옆으로, 멀더와는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슬쩍슬쩍 여배우를 훔쳐보면서 영어로 뭐라고 갑자기 흥분된 어조로 길게 말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배우를 바로 앞에 두었으니 심장이 두근거려서 한국어는 잊었다. '액티리스 문소리씨는 외모가 화려해서가 아니라 지적인 아름다움이 풍부한 그럼 이미지에... 대충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는 ‘무엇보다... 연기는 죽여 그렇지 않니? 이즌 잇(isn't it)? (이즌 잇 같은 소리 하네.) '아니' 라고 입모양을 내니 놀란 얼굴이다. 영어의 부정 의문문을 한국어로 '그래 같은생각이야' 라고 대답하는 방식이다... 아 콩글리쉬로 이걸 또 어떻게 설명하나... 

    어쨌거나 이런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한 나는 옆자리 문배우를 향해 인사를 하고는 '이 친구가 문소리님 팬입니다' 하니 문소리씨는 즉시 감사합니다로 화답했고,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너의 마음을 읽어준 스승님 아니겠니' 생색을 내는 표정으로 멀더를 보니, 그는 이미 배낭을 열어 급히 책을 꺼내 앞 면을 이미 펼치고 있었다. 문 소리 배우님은 샤샤샥 뭐라고 적으시고 2003년 가을이라는 문구로 우리 인생의 한 순간을 새겨 주셨다. 눈 앞에 앉은 외국인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을 하지도 않았음에도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적어주신 이유는 그 번개같이 펼친 책이 바로 그 애물단지 멀더의 한국어교재였다.


                  제이슨의 초급 한국어 책은 뉴욕 제이슨집 아름다운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다.    

                                                  



   자신이 연기를 극찬한 아름다운 여배우를 직접 본 제이슨은 그 심작박동으로 뇌가 힘들었는지 다음날 아침에 나더러 "잘 끝났어요?" 라고 물었다. WHAT?  대체 저 말은 또 무슨 말일까.....아...잘 잤냐고? ...찰떡같이 알아듣는 스승님이라 다행이지 않니..."엉 잠이 잘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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