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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 사는 로젠 Jan 02. 2024

첫번째 수업

   ㅣ한국어의 꽃ㅣ


   루이스의 수업 신청을 받은 지 2주가 지났지만 담당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한 2주는 흘러갔기 때문에 일단 나라도 시작을 해야 했다. 루이스는 이미 한국말을 잘해서 부담이 없었다. 여느 유럽 사람처럼 영어도 잘했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어학당에서 한국어 정규 코스를 밟고 있다면, 한국어 교재에는 나오지 않으나 한국인들이 생활에서 쓰는 말을 알려주면 좋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어는 소리말에서 더 빛난다고 본다. 이를 테면 음성상징어 같은 것이다. 특히 모음의 변화에 따른 어조, 뉘앙스 차이야 말로 한국어의 특징 중의 특징이다. 시그니처 치킨 브랜드의 시그니처 메뉴 같은 것이다. 


물이 졸졸 흐르고 있어요. (그런가 보다) 물이 줄줄 흐르고 있어요. (대책이 필요하다) 

해가 져서 깜깜하네요. (맑은 여름 저녁) 해가 져서 컴컴하네요. (겨울 저녁 어두움)


    모음을 뒤집었을 뿐인데... 루이스는 "오!" 이랬다. 특히 발음할 때 단어의 어조를 살려서, 졸졸은 짧고 빠르게 줄 줄은 낮게 천천히 읽어주면 좋다. 루이스는 웃었다. "재미있어요" (그럴 수밖에) 내가 세계 모든 언어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어 음성상징어는 재미있다. 리듬을 타서 발음할수록 더욱 실감 난다. 물론 먼저 '아야오요(양성모음)'와 '어여우유(음성모음)'의 어감 차이를 쉽게 설명해 준다. 양성모음은 '맑고 밝고 가볍고', 음성모음은 '흐리고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준다는 점. 루이스는 언어 감각이 있었다. 나는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었다. 


ㅣ노랗다와 누렇다가 같은 색?ㅣ


   '노랗다'는 영어로 옐로(yellow)다. "그렇다면 누렇다는 영어로 어떻게 될까요?"라고 물으니, 루이스는 망설인다. "......" 누렇다 역시 옐로(yellow)다. 노노노. 한국 사람들에게는 용서가 안 되는 번역이다. 노랗다와 누렇다는 완전히 다른 색이기 때문이다. 노랗다에서 출발한 단어는 노르다, 노르스름하다, 노르무레하다, 노르께하다, 노릇하다... 이쯤 되면 내가 하려는 말을 이해한 스페인 사람 루이스가 큭큭거린다. 학생이 낄낄거린다고 같이 웃다가 중단하면 안 된다. 모음을 뒤집어서, 누렇다, 누르다, 누르스름하다, 누르께하다, 누릇하다가 됩니다. 끝이에요? 계속 웃으면서 루이스가 묻는다. 그럴 리가요. '누르끼리하다'가 남았다. (샛노랗다까지는 못 갔다) 푸하하하. 

    역시 또 내가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어떤 언어에서 이렇게 다양한 색감의 구사가 가능한지?  흔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이런 미세한 색감의 차이를 낳은 한국어의 역사나 철학이야기까지 꺼내지 못했지만 (나도 그제야 알아가고 있었으니) 루이스는 이런 단어들에 철학이 있는 것 같다고 반응했다. (와. 내가 만나는 외국인들은 다 독심술을 하나.) 어찌 알았을까 내가 철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루이스는 첫 수업이 끝날 즈음에 나에게 줄 것이 있다면서 자신의 공책을 열었다. 긴 공책 사이에 엽서가 한 장 끼어 있었다.『돈 키호테』의 한 장면인듯. 앉아있는 세르반데스 조각상을 배경으로 산초와 로시 난데와 돈 키호테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자신의 이메일 주소에서 돈 키호테를 떠올린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아.. 나도 이메일 주소가 신기했어요.) 더군다나 돈 키호테의 후손이라니... 그 미지의 일상이 오늘 나의 일상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엽서를 받은 기념으로 퀴즈를 한 가지 던졌다. 소파에 옆으로 드러눕는 포즈를 취하니 루이스는 킥킥 웃었다. "고야!" 하면서 또 놀라운 듯 나를 본다. "고야(Goya)를 알고 있으세요?" 나는 당시 수능강사였다. 대한민국 수능강사의 특징은 박학다식. 얕고 넓게 아는 것이 많다. '고야' 정도를 아는 것은 껌이지요. 그 그림이 루이스가 사는 마드리드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


옷 입은 마하, 1803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 (1746~1828)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9E%80%EC%8B%9C%EC%8A%A4%EC%BD%94_%EA%B3%A0%EC%95%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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