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은 곧 세계이다
페미니즘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말하기에 내게는 깡이 없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여 내 삶의 근간을 흔드는 것도 두렵다. 내가 살아온 방식과 말해온 언어를 바꿔야 하는 것을 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나는 페미니스트야'라는 말을 하려 할 때마다 머리와 언어 사이의 머나먼 거리를 느낀다.
그치만, 노력하지도 않았다.
이젠 말해보려 한다.
섣부르게 말하는 것을 넘어 글로서 이야기해보려 하는 것은 그래서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니까
두 번째 이야기 : 처음 누른 ESC
가해자임을 인정하기
작년 가을, 학교 뒷편의 게르 안에 누군가 남성의 음경을 깍두기(베개?)에 그려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심지어 이 그림이 게르 외의 학교 곳곳에서 발견되며 문제는 점점 심각해졌다. 사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였다.
공공 기물에 대한 의식 부족, 그리고 성에 대한 의식 부족.
페미니즘을 배운 나는 달라야 했다. 일반중학교를 다니던 때에 강당, 혹은 특별실 책상 끄트머리에서 흔히 접해온 이런 그림들에 침묵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과거의 모습과는 달라졌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만든 것이 성교육 제안팀 ESC였다.
말이 앞서는 만큼 행동도 앞서는 나다. 어떻게 그럴 용기(정확히는 만용)를 냈는지는 모르지만, 교내 방방 곳곳에 성교육을 바꿔보자는 취지의 대자보를 게시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주제넘은 일이었는지를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고3 선배들이 들어올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친했던 선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선배도 있었다. 같은 학년 친구들도 꽤 있었지만 결국 (생물학적) 남성은 나 혼자만 남게 되었고 이 활동이 1년이 넘게 장기적으로 진행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던 시기였달까, 회의 내에서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당시의 내 수용량을 초과한지 오래였다.
'생물학적 성'과 '사회학적 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기, 혐오발언 주의하기, 퀴어 문제(당시에는 용어 자체가 낯설었다), 한 번도 안 써본 생리대, 성교육 법, 섹스에 대한 올바른 지식...
시도때도 없이 나를 괴롭게 하던 ESC는 내게 슬슬 작별을 고해오기 시작했다. '이런 활동을 하고 있어'라는 간판 이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은근슬쩍 탈출을 감행했다. 새로운 성교육을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성교육의 변화를 위한 제안서를 작성하자는 것에서 끝나야했던 내 기획은 어느새 우리가 직접 성교육을 진행하는 것으로 발전되버렸다. 혼자만 끙끙 앓다 성교육이 끝났고 선배들은 떠났다.
내가 벌린 일이었다. 내 가해자성을 인정하는 것이 페미니즘 활동의 시작이어야 했지만, 나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에 와닿기까지 걸린 시간은 반 년이었다. 내가 저지른 일로부터 계속해서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내려가던 페이스북에 뭔가 엄청난 것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