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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우 Jul 15. 2024

오리온자리

별자리를 그리워하며




어둠이 내린 하늘에서 오리온자리를 찾는 건 군인 시절부터 시작된 오래된 습관이다. 21년 여름에 전역했으니, 어느덧 3년이 훌쩍 지났다.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보다도 밝은 오리온자리는 살면서 처음으로 외운 별자리다. 인터넷에 조금 검색을 해보니 오리온자리는 별자리 중에서도 가장 찾기 쉬운 별자리라더라. 북반구 기준 한여름인 8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의 밤을 비추는 오리온자리를, 매일 밤에 걸쳐 찾는다.


처음으로 오리온자리를 의식한 곳은 2020년 2월의 훈련소였다. 지금은 사라진 30사단 신병교육대에서 내 유일한 취미는 저녁식사 후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 위의 달과 별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사람으로 북적였던 그곳에서 사람다운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바깥에는 '우한 폐렴(당시 명칭)'이라는 질병이 창궐하고 대구는 난리라는데, 하루종일 구르기 바빴던 내게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훈련을 마치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손 노트 하나에 빼곡히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생활관에는 늘 온갖 음담패설과 온라인 커뮤니티 드립, 욕설이 가득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밥을 먹고 난 직후뿐이었다. 살기 위해 입안 가득히 음식을 꾸겨 넣었고, 잠시라도 혼자 있고 싶어 채 씹지도 않은 밥을 억지로 삼켰다. 도망치듯 나온 그 앞에 펼쳐진 풍경, 식당 옆 연병장 너머로 보이던 아파트단지와 푸르스름했던 하늘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직감했다.


어디선가 본 듯했던 그 별자리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핸드폰을 받고 난 직후였다. 아 저게 '오리온자리'구나 하며 이곳저곳 다른 별자리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끝내 기억에 남은 별자리는 몇 없다. 자대에 도착하자마자 발목이 부러졌고, 그렇게 행정병 업무를 맡게 됐다. 휴가와 근무, 기타 각종 서류 작업까지 행정병 업무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면 돌아오는 길이 막막했고 흡연장에 앉아 연거푸 줄담배를 피웠다. 막사에서 가장 멀던 구석의 흡연장은 내가 홀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누가 봐도 사람처럼 생긴 오리온자리를 볼 때마다 시체와 다를 것 없었던 나 자신을 투영했다.


5월이 되고 오리온자리가 사라졌던 그해 봄과 여름은 정말 죽고 싶었다. 중대장은 날 싫어했고, 끊임없이 도발하며 나를 착취했다. 방패막이었던 사수가 전역한 이후 그 짓거리는 더욱 심해졌다. 직장 생활의 안 좋은 점은 바로 상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최악인 점은 그 상사를 내일도 봐야 하는 것이라던 <미생>의 근본 넘치는 명대사는, 마치 누군가 머리에 오함마로 깡깡 박아 넣듯 깊게 각인됐다. 그는 내 SNS를 뒤졌고 사회에서의 나를 아는 척했다. "석우 너, 내가 이런 말 했다고 인터넷에 글 쓰는 거 아니지?"라는 그의 말을 이제야 쓰게 될 줄이야. 낮에는 그의 앞에서 웃어줘야 했다. “하 새끼 이거 보통 아니네”라는 말에 나는 웃어줬는지 노려봤는지. 그런 사람과 매일매일 지는 싸움을 거듭했다. 남아있는 군 생활만큼이나 까마득히 높은 낮의 하늘에 내내 짓눌리기 바빴다. 보상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않던, 심지어는 훈련을 마치고도 시켰던 야근을 마치고 나는 늘 오리온자리를 찾았다. 동정심 가득한 당직간부의 시선을 받으며 야근을 마치던 6월의 새벽, 별자리가 뜨지 않았다는 이유로 울적했다. 외롭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별자리는 그곳의 누구보다도 반가웠다. 늘 최악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암담했던 군 생활 가운데, 이름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별에 마음을 주게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오리온자리가 다시 떴다며 신나던 나를 동기들은 필경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5월이 되고 오리온자리는 다시 사라졌지만 이전만큼 기다림이 어렵지 않았다.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다시 오리온자리가 뜨면 나는 전역이었다. 가지 않는 시간 속에서 어떤 날은 빨리 별자리가 뜨게 해 달라며 손발을 모아 빌고, 어떤 날은 마음 편히 다른 별을 구경했다. 어차피 지구 반대편 저 어딘가 즈음에 있을 테니까. 오리온자리가 저문 그 자리의 별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밤도, 낮도 싫지 않았다. 별자리 하나에 의지했던 그 시간들이 우스워질 만큼 점차 행복해졌고 오리온자리가 없었던 8월, 나는 전역했다.


전역 후 이사한 집 앞에는 빈 공터가 있다. 전역 후 세 번의 겨울을 통과하며 셀 수 없을 만큼 오리온자리의 사진을 찍었고, 여느 때와 같이 오리온자리를 구경하다 글감을 정했다. 현생의 조급함과 과거를 향한 의심 속에서 위축되는 요즘, 다시 오리온자리를 찾곤 한다. 군대보다 바깥이 더 지옥이라는 말에 딱히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가끔은 현실이 그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고독했던 때를 겪었다 해서 고독이 사라지지 않듯 감정은 늘 요동치니까. 사회가 군대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그렇다.


그럴 때면 오리온자리의 교훈을 되새긴다. 모든 별이 내 하늘을 비추지 않더라도 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오리온자리를 찾아 헤매던 내 밤은 늘 친구들의 전화와 함께였고,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가장 어두운 시기일수록 별은 가장 밝게 빛난다는 다소 진부한 말도 비로소 이해한다. 가장 힘들었던 그때야말로 내 곁을 지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테니. 당장의 피로와 지치는 마음도 어쩌면 한때라는 생각에 되려 내일을 살 힘을 얻을 때도 있다. 수많은 고민이 교차하는 와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별빛은 여전히 예쁘다.


오리온자리를 사랑하는 나를, 한 친구는 '온'이라는 이름으로 블로그에 기록한다.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다. 또다시 이름 붙일 수 있는 별이 나타나기를, 그리고 계속해서 그것들에 기댈 수 있기를. '석우'가 누군가에게 '온'이 되듯이.


- 202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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