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주차_기다리는 마음
"이거다! 가격도 괜찮고 상태도 좋다. 주말에 강남 한 번 다녀오자."
"강남 어디? 반포? 콜!"
아내의 출산 예정일이 두 달 정도 남았다. 이 시기가 되니 아이 물건 사러 다니는 게 일상이 됐다. 지난주엔 당근으로 아기 침대를 사왔다. 기저귀 갈이대도 하나 장만했고, 유명하다는 아기 의자도 새로 샀다. 그리 크지 않은 집이라 벌써 집안 곳곳에 아이 물건이 눈에 띈다.
주인 있는 물건에는 그 주인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이별한 사람들은 이별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방이 남긴 물건부터 치운다. 반대로, 우리 집엔 새로운 물건이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들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 같다. 늘어나는 아이 물건만큼 파이리와의 만남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건 어디 둘까?",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또 필요한 거 뭐 있지?" 새로 들인 물건을 놓고 아내와 토론하다보면 이제 정말 파이리를 만날 때가 됐다는 게 실감난다.
곧 딸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예전에 봤던 짧은 영상이 하나 떠오른다. <마스터 셰프 주니어 브라질> 편에 나온 영상이라고 한다.
<유튜브 영상보기= https://youtu.be/nbqb5R0yswE>
두 명의 참가자가 짧은 시간 안에 음식을 완성하는 대결을 펼치고 있다. 참가자 중 소녀처럼 보이는 한 명이 잼 뚜껑을 여는데, 굳었는지 열리지가 않는다. 알다시피 잼 뚜껑은 한 번 안 열리면 계속해도 잘 안 열린다. 소녀는 속이 타고 지켜보는 이들은 안타깝고. 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소녀가 관중석을 향해 달린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가 딸이 건네는 잼 병을 건네받더니 말그대로 '우주의 기운'을 모은다. 뙇!!! 한 방에 잼 뚜껑이 열린다.
오랜만에 영상을 다시 보니,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날 것 같다. 환호하는 주변 사람들, 열린 잼 병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며 엷은 미소를 띄우는 소녀. 그리고 티를 안 내려 하지만 느껴지는 아버지의 뿌듯함.
영상 속의 브라질 아저씨가 매우 부럽게 느껴진다. 딸이 생겼으니 비슷한 경험을 할 기회가 오겠지. 그전까지 악력을 좀 길러놔야겠다. 저 상황에서 잼 뚜껑을 못 열어 쩔쩔매고 싶진 않으니… 당장 악력기라도 하나 사야겠다.
병원은 언제 가도 별로지만 갑자기 가는 게 제일 별로인 것 같다. 퇴근길에 아내가 하혈을 해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 말고 병원으로 향했다. 파이리 초음파 영상을 보러갈 땐 설레던 길이 유난히 심란하게 느껴졌다.
아내는 산부인과의 응급실 격인 24시간 분만실로 들어갔다. 같이 들여보내주지 않아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한참 뒤에 입장을 허락받아 분만실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울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내가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분만실에서 태동 검사와 배 뭉침 검사를 받았다. 내내 마음이 불안해 신경이 곤두섰다. 간호사가 지나가듯 하는 말도 예민하게 들렸다.
아내가 링겔을 맞으면서 안정을 찾아 마음이 놓였다. 링겔 떨어지는 속도를 보니 세 시간은 넘게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저녁을 먹으러 편의점에 갔다. 삼각김밥, 컵라면, 소시지를 자취하던 시절에 습득한 능숙한 동작으로 조리해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선지 예전 그맛이 나질 않았다. 못 먹겠더라. 몇 년 사이 입맛도 변한 것 같았다.
이젠 갑자기 병원에 오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출산이 다가오고 있기도 하고, 갓 태어난 아이는 시도때도 없이 아프다고 하니까. 병원에 올 때마다 또 얼마나 신경이 곤두설지 걱정이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 편의점 삼각김밥과 소시지 맛에도 다시 적응해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