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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un 16. 2020

옷 한 벌이 만들어낸 기억들

'이 옷'과 장난같은 여행이 시작되었다

옷 사는 걸 즐기고 구입한 옷에 애정을 듬뿍 쏟는 나는 단기적으로 긴축에 들어가거나 여러 이유로 맘에 드는 옷 한 벌을 구입하지 못하면 기분이 다운되었다.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던 그 단순한 사실을 예민함이 극에 달았던 어느 날 남편이 알려주었다. 처음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도 해보았지만 아무리 안 그런 척 해도 티가 난다고, 남편은 힘주어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견 맞는 부분도 있어 헛웃음이 났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의 상태를 들켜버려 조금 쑥스럽기도 했지만 기분이 처져 보이거나 신경질적인 상태가 되면 자연스레 옷 한 벌 구입을 권하는 게 이젠 더 이상 생소한 일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게 싫지 않고 기분전환도 할겸 마지막으로 옷을 산 게 언젠지 날짜를 세어봤다. 시간이 좀 많이 지났다 싶으면 서둘러 쇼핑에 나서게 되었으니 이젠 그런 나를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쉬운 결론만큼 옷 사는 일이 만만한 건 아니었다. 몸에 군살이 붙고 입고 싶은 옷과 살 수 있는 옷에 갭이 생기면서 언제든 쇼핑이 가능한 게 아니라는 씁쓸한 현실과 마주했다. 그러니 옷을 고르는데 더 까다로워지고 옷 한 벌에 대한 집착이 날로 짙어졌다. 그렇게 심리적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만큼 옷이 좋았지만 가진 옷 모두를 골고루 다 좋아할 수는 없었다. 주구장창 꺼내 입다 낡거나 질려서 짧은 기간에 정리해버리는 옷도 있고, 싫은 건 아닌데 손이 잘 가지 않아 결국 다른 사람 주거나 반대로 몇 년 뒤 빛을 발해 그 당시 이 옷을 구입한 나를 셀프 칭찬하며 입는 옷도 있었다. 이상하게 잘 입지는 않으면서 그냥 보기만 해도 좋은 옷도 있었으며, 딱히 그럴 이유도 없는데 잘 안 입어지는 옷도 있었다.


‘이 옷’은 바로 그런 옷 중에 하나였다. 싫은 건 아닌데 그동안 활용을 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번에 알게 된 참으로 다양한 나름의 이유로 이 옷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이 옷’은 소재가 린넨(마 원단)이라 여름의 시작과 끝에 어울리나 치렁치렁 길이가 길어 자칫 더울 수도 있었다. 또한 블랙 앤 화이트 구성이라 컬러 면에서 질리지는 않았으나 무릎 아래쪽 양 옆으로 난 트임이 무난하지 않아 입고 갈 곳을 타는 옷이었다. 게다가 스퀘어 넥이라 여성스러움이 강조되는 반면 퍼프소매로 귀여운 면이 부각되어 자칫 나이 값을 못해 보일 수 있는 옷이었고, 마지막으로 바지라서 편하지만 통이 넓어 거추장스럽기도 했다. 이렇듯 그 매력이 차고 넘치지만 올인원 스타일이라 실제로는 불편한 그런 옷, 그야말로 장점이 많으나 단점도 만만치 않은 옷이었다.

그 불편함을 처음 알아본 건 바로 부동산 아주머니였다. 첫 집을 부동산에 내놓던 날 우연히도 이 옷을 입고 있었다. 부동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날도 아니고 어쩌면 너무나 보통날이라 잊힐 법도 한 날인데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날, 비가 와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부동산을 나설 무렵 내 옷을 유심히 보던 아주머니가 그런 옷은 어디서 사냐고 물으셨다. 별말 없이 씨익- 미소를 짓는 내게 밖에서 화장실에 갈 때는 어떻게 하냐는 말까지 놓치지 않고 덧붙이셨다. 속 모르는 남이 들으면 참 별걸 다 묻는다 싶겠지만 이 옷은 타인으로부터 하여금 그런 궁금증을 일게 하는 요상한 옷임에는 틀림없었다.


모임 날을 함께한 기억


그래서 이 옷을 구입한지는 꽤 되지만 실제로 입은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것도 잠깐씩 입고 외출했다 결국 갈아입길 반복해서 실제 이 옷을 입고 괜찮다 싶은 사진을 처음 찍은 건 2년 전이었다. 경기도 양평에 집을 지어 이사를 들어간 지인분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독서모임을 집에서 가질 수 있도록 초대해 주셨다. 아담하게 지은 2층 집은 예쁜 것과는 별개로 너무나 실속 있게 지어져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나 집 앞에 데크를 멋있게 깔아 날 맑은 날 햇살 가득 받으며 호사를 누리게 했다. 준비된 음식마저도 너무나 정성스럽고 맛깔스러운 데다 좋은 것만 눈에 담으며 기분 좋았던 그 날,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나눈 대화가 아직도 선명하다.

데이트룩이 되어준 기억


두 번째 사진기억은 제주 한 카페였다. 남편이 있는 제주에서 수많은 곳을 가보고 각양각색의 꽃을 즐겼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 예뻤던 장소는 장미정원이 있는 이 곳이었다. 장미 하면 아파트 담장 어디에나 피어있는 흔하디 흔한 꽃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판을 벌여 보여주니 그 다양한 색상과 화려한 어우러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늘 회사일로 바쁘고 제주를 찾는 다른 지인들에게 시간을 내어주느라 나와 함께할 시간은 부족했던 남편에 대한 원망이 커질 무렵, 남편은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나를 그리로 데려갔다. 둘만 여유롭게 즐긴 데이트라 그 의미가 남다르기도 했지만 한때 휴대폰의 배경 사진으로 해 놓을 만큼 그냥 작정하고 예쁜 곳이어서 가끔씩 생각나는 곳이다.   


혼자 여행도 가뿐한 기억


그리고 두 번의 해가 바뀌었다. 이 옷을 꺼내 입어도 좋을 만큼 더위가 시작되던 날 나는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기억될 거라 생각지 못했던 날 입었던 옷이 하필 이 옷이라는 우연의 요소가 강했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하루를 준비하며 나는 이 옷을 선택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코로나와 육아로 지친 나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조금 걷고 싶었고 그래서 꺼내 든 까맣고 커다란 배낭과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은 이유가 다였다. 아이를 잠시 시골에 보내고 갑작스럽게 주어진 시간 동안 혼자 하기로 한 짧은 여행이었다. 배낭 하나를 메고 말도 안 될 정도로 저렴한 값의 표를 들고 제주 비행기에 올랐다. 저녁 늦게 도착해 하룻밤만 자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계획도 없고 할 것도 없는, 누가 안다면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그런 여행이지만 살다 보면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효율성과 가성비 따지지 않고 목적 없고 의미마저 없어 보이지만 그냥 하루 내가 하고 싶은 그런 일을 하는 하루. 아침에 일어나 남편 집 청소를 마치고 배낭과 어울릴 것 같다는 이유로 고른 ‘이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2년 간 지나치기만 하고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집 근처 공방에 들어가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제주 지인의 세컨드 하우스에 초대받았던 날 선물한 마카롱 생각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익숙하지만 차로만 다니던 길을 두 발로 직접 걷는 느낌이 꽤 달랐다. 이번 마카롱은 다름 아닌 남편 팀원들에게 돌아갈 몫이었다. 타지에 있는 신랑을 챙겨주는 그 마음에 보답하고픈 마음은 늘 있었지만 그동안은 생각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시간이 남으면 아차차 지나쳤고 조금 정신 든다 싶으면 인천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운전대에서 손을 떼자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냥 그대로 옮길 수 있었다. 두손가득 마카롱을 포장해 가게를 나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계속 이어 걸었고 주택가 골목 사이로 쭉 뻗은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대강 방향만 체크하고 걸은 길은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은 동네 속 올레길 같은 그런 길이었다. 그 사이 감귤 밭도 보이고 요가원도 보이더니 낯선 길에서 순간 앞으로 다시 와야 할 곳으로 거듭났다. 남편에게 차키를 받아야 할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마냥 걸을 수만은 없어 그 길 끝에서 결국 택시를 잡아탔다. 한 시간 남짓한 걸음에도 땀이 흠뻑 났다. 이렇게 개운한 기분을 느낀 게 얼마만인지, 두 손에 쥐고 있던 책임과 의무를 잠시 내려놓고 나만 챙기고 나만 생각할 수 있는 이 여유가 감사했다.

피곤한 느낌이 싫어 무리를 하지 않는 편인 나는 짧은 하루 여행에서 스벅 제주컵 구입하기라는 소심한 미션 하나를 잡았다. 제주까지 와서 그것도 가장 여유로운 시점에 가장 공들인 일이 겨우 스벅 컵 입고 대기라니, 조금 한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야말로 평상 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니 나름 의미가 있다 여겨졌다. 그런데 재밌는 건 바로 구입은커녕 직원의 검수가 끝나고 진열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컵은 진즉에 품절이었고 입고는 될 거지만 시간은 장담할 수 없다고 진열대 앞을 서성이는 내게 직원이 알려준 정보였다. 하지만 대기 한 시간 사십 분 끝에 결국 나는 빈손으로 자리를 뜨고 말았다. 오전부터 걷고 커피 한잔만 마신 데다 오후 한 시가 넘어가기 시작하니 배가 너무 고팠다. 이렇게 옷 한 벌 가지고 나름 의미심장하게 쓴 글이니 품절됐던 컵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끝끝내 ‘겟'하고야 말았다는 해피엔딩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늘 행운만 가득하다면 그게 어디 인생이겠는가?


이 시점에 잠시 제주로 넘어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브런치에 쓸 글 하나를 구상한 일 정도까지만이 내 행운이었다. 급하게 할 일도 없고 딱히 가고 싶은 데도 없었으니 빠르게 처리해주지 않은 직원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간단히 국밥 한 그릇을 먹고 굳이 조퇴를 하고 나오겠다는 남편을 만나러 갔다. 차키를 주면서 본, 커다란 배낭을 메고 땀 흘리고 있던 내 모습이 짠하고 눈에 선해 도저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을 보며 저런 마음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혼자 내버려두질 않아 불편하다고 툴툴대며 남편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삼화에 새로 생긴 스벅으로 향했다. 그리곤 3분도 채 안되어 ‘제주컵’과 ‘종달리 수국가방’을 사들고 나왔다. 제주를 3년이상 오가며 그곳에 가면 원하던 걸 구할 수 있을 거란 것쯤은 이젠 검색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었다. 뭐든 이리 쉬운 길을 두고도 괜히 돌아가고 싶은 객기를 부리는 게 인생인가 싶은 생각에 다시 한번 입가에 설핏-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무작정 걷고 싶어 시작한 장난 같은 여행에 함께 해 준 ‘이 옷’에 무한한 애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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