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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Aug 29. 2016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

반전의 이별, 첫사랑 #6

'181818181818'

연락이 되지 않는 노안에게 화가 나고 답답해 찍어 보낸 문자메시지. 아니나 다를까 노안에게서 득달같이 전화가 걸려왔다.


"너지?"

"뭐가?"


"야, 이런 짓 할 사람 너 밖에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니가 181818 찍어 보낸 거 아니야?"
"오빠 나한테만 못되게 구는 거야? 잘 생각해봐. 난 아니야!"


딱 잡아뗐다. 열여덟이라는 숫자에 그렇게도 빠르게 반응하면서 지금까지 씹은 수많은 문자는 뭐야? 결국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귀찮았던 거잖아! 싶어 졌다. 그래 그랬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질질 새고, 개버릇은 남 못주는 법이지.


4학년이 되던 해 우리집에는 대학생이 셋, 등록금을 대기가 빠듯했던 집안 사정으로 휴학을 했었다. 오빠는 제대해 복학을 해야 하고, 언니는 동시대학원에 입학하길 원했고 엄마는 내 눈치를 봤다. 누구에게 등 떠밀려 휴학을 하느니, 스스로 휴학하고 맘 편히 살자라고 생각했다. 여하튼 휴학을 하고 나는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노안은 학교에 남았다. 그렇게 주말 커플이 되었다. 주말에 만나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또 그다음 주말에는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셨다. 다음 주말엔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반복, 반복, 반복. 그러더니 급기야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견디다 못한 내가 쌍씨옷 다발을 날리고서야 전화연락이 닿았던 그 날, 이번에도 내가 먼저 이별을 이야기했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사무실 점심시간이었다. 반복되는 데이트와 뜸해지는 연락, 말끝마다 빈정대는 말투, 속내가 뒤틀리면 며칠이고 연락을 끊고 말도 안 하는 노안의 무언의 폭력에 점점 지쳐가고 있기도 했다. 그만하자 싶었다.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약속한 게 있었다. 다시는 헤어지자는 말 하지 말기.  그러나 그게 되나?


"오빠 우리 그만하자. 내가 늘 매달리듯이 연애하는 거 지친다. 헤어져."

"그래? 알았다. 그런데 이거 하나만은 분명히 하자. 분명 니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 그런 거다!"


마치 헤어지자는 말을 기다린 사람처럼 냉큼 이별을 받아 드는 노안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뭐야? 내가 헤어지자고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뭐? 지금 그게 중요해?"

"어, 매우 중요해. 니가 나중에 딴소리할까 봐. 니가 나 찬 거다."


그리고 툭 끊어진 전화. 이건 뭡니까? 멍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내가 헤어지자고 말해놓고도 당한 의문의 1패.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별에도 예의라는 게 있는 거잖아. 퇴근 후 나는 용인으로 달려갔다. 일하던 종각역에서 고속터미널로, 버스를 타고 용인까지 달렸다. 터미널에서 태려 택시를 잡아타고 노안과 과선배들이 함께 살고 있던 집 앞에 도착했을 땐 저녁 10시.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노안이 나타났다.


"왜 왔어?"

"아니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리면 어떻게 해? 오빠가 요즘에 연락도 잘 안되고, 만나기도 힘드니까 내가 속상해서 그런 거잖아."


"너 나랑 약속했지. 다시는 헤어지자는 말 하지 않기로? 그런데 어긴 건 너잖아. 됐어 필요 없어. 그만해."

"오빠..... 왜 이래.... 그것 때문에 화난 거면 미안해. 나도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


"됐다. 나는 헤어지자는 말 그렇게 쉽게 하는 여자 만나기 싫다. 분명히 말하지만 니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


꽝! 들어오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노안은 대문 너머로 사라져 갔다. 한 참을 문 앞에 서 있다가 마지막 막차를 탔다. 버스 안에서 줄줄 흐르던 눈물과 이마로 전해지던 차가운 유리의 감촉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정말 끝이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그날의 일을 곱씹으며, 왜 그냥 솔직히 이래서 너무 화가 나 하면 될 걸 그리 쉽게 이별을 말한 걸까? 하지 말자고 약속해놓고 왜 그랬어. 스스로를 탓하기까지 했다. 그때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지금까지 만나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면서.

1년의 휴학과 일과 학업을 병행했던 4학년이 지나고 파란만장 대학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졸업이라는 걸 하게 됐다. 졸업식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해서 사은회에 참석했드랬다. 물론... 그때까지도 정보에 뒤쳐진 담당교수의 질문에 울컥하긴 했지만.


"주영, 오랜만이다. 이제 노안이랑 결혼해야지? 이번에 5급 공무원 시험 패스 했으니 결혼할 일만 남았네~!"

"아...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 노안이랑 헤어졌는데요. 모르셨구나."


"아 그래? 몰랐네 미안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근데 누가 찬 거야? 너야 노안이야?"

"네?"


그게 정녕 왜 궁금한 거냐? 이 주책바가지 교수님하. 이 교수님은 집에 갈 때까지 나에게 누가 찬 건지 캐묻다가 갔다. 나는 물론 동기들 마다 물어봐서 환장할 지경에 이르렀다. 여하튼 교수들은 사라지고 동기들도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할 때쯤, 만수르와 마주 앉았다. 만수르는 여수에서 올라온 전라도 머스마였다. 여수에서 자기네 땅 안 밟으면 다닐 수가 없다는, 기차 타고 내려가다 보면 '여그부터 만수르네 땅'이라고 표지판도 서있다고 눈 똑 띠 뜨고 봐라잉~ 했던, 그래서 내 맘대로 여수 만수르라고 부르기로 한다. 여하튼 여수 만수르와 술잔을 기울였다. 


"내가 잘못한 거 같아... "

"뭣을?"


"그때 내가 헤어지자고만 안 했어도 좋았을 텐데.. 내가 바보같이..."

"아따.... 너 진짜 고로코롬 생각허냐?"


"응.... 자꾸 후회돼....."

"등신... 이런 상 등신아, 환장해 불겠네. 아따! 내가 진짜 이야기 안 헐라고 했는디 오늘은 해야쓰겄다."


"무슨 이야기? 나 등신이래도 할 말 없지 뭐.. "

"야 이런 등신아, 니만 몰랐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안다. 니 잘못 아니라는 거. 노안 바람났었어!! 니만 몰랐든 겨!"


"뭐? 뭐라고?"


정신이 번쩍 났다. 지난 일 년 동안의 자책의 시간들이 시속 200km로 뒤통수 까이는 이 소리는 뭐단 말인가? 담당 교수와 나만 몰랐던, 온 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는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나와 연락이 뜸해지던 시점 노안은 우체국 여직원과 가까워졌다. 둘이 연애한다고 노안이 나를 낚기 위한 소문을 뿌렸을 때 우체국 여직원은 진심이었나 보다. 다시 나를 만나는 노안을 보고 포기했다가, 내가 사라진 자리를 채고 들어왔고 노안은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매일 둘이 차에 오손도손 앉아 우체국 여직원이 집에서 정성스럽게 싸온 도시락을 까먹고, 노안은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시켜주기도 마다하지 않았단다. 일주일에 한 번, 이 주일에 한 번 날 만나주는 시간외에는 노안 곁에 항상 우체국 여직원이 있었단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하기 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내가 휴학했던 시점 공교롭게도 나의 절친들은 모두 휴학, 나와 친했던 선배들은 그와도 절친이었으므로 나서지 못했고 결국 나만 모르는 상황이 된 것. 게다가.... 


"너 노안 만나는 거, 너랑 친한 애기들은 다 싫어하는디 말해줄 성 싶어? 헤어졌다는디 그냥 내부러 두자. 말해줘봐야 너 상처만 받지 싶어서 그래서 우덜끼리도 너에게 말허지말자~ 한 거인디... 이게 뭔.... 헛짓거리여... 이거시...."


그래 욕먹어도 싸다. 다 참았다. 지나간 연인도 참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정하는 것도 참았지만, 양다리에 내 피를 말려 스스로 이별을 말하게 한 건 참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뭐 이미 끝난 일 안 참는다고 해도 참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나에게 미안했다. 이토록 등신 같은 내가 나에게 너무 미안해 견딜 수 없었다. 이런 지긋지긋한  첫사랑, 나에게 모질고 모질 었던 첫사랑은 이렇게 끝이 났다. 


첫사랑의 소식은 간간이 들려왔다. 듣기 싫어도, 알기 싫어도 자꾸 듣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컴퍼스 커플의 숙명이다. 하필 노안 결혼식 전 날 여 동기 모임을 하는 바람에 아주 고맙게도 결혼 소식까지 전해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것도 2년 만에 모임이었는데 말이다. 노안은 헤어지고 단 한 번의 연락이 없었다. 남들 다한다는 헤어진 여자 못 잊어 술 마시고 전화질도 한 번 없이 깔끔했다. 너무나 깔끔해서 내 존재가 노안에게 어떤 정도였는지 저절로 느껴질 만큼.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다음 편에 계속   





번외 이야기

나는 한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났지만 진심으로 대할 수 없었다. 내 속을 드러내면 돌변하지 않을까 무서웠고 좋아한다는 걸 알게되면 막대할까봐 겁났다. 그래서 노안과의 이별 후 나는 사람을 오래 만날 수 없었다. 짧게는 일주일, 길어봐야 석달을 넘기지 못하는 시간들이 꽤 지속됐다. 처음과 조금이라도 다른 행동을 하면 얼른 도망쳐버렸다. 늘 한 발은 뒤로 빼놓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늘 준비되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따지고 보면 내 인생에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노안이 아닌 다른 사람을 첫사랑을 사랑했더라면 내 사랑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다르긴 할까? 나는 아직도 때로 그것이 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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