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진 Aug 21. 2016

이젠, 사랑이야

소문과 거짓말, 첫사랑 #5

"너 정말 나랑 헤어질 거야?"

"응."


헤어진 지 얼마 후, 늦은 밤 노안이 나를 찾아왔다. 수업도 끝나고 기숙사 점호도 끝난 시각, 전화벨이 울렸다. 기숙사 앞으로 잠시만 나오라는 말, 물어볼 게 있다는 말에 어느 사이 기숙사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더라. 노안은 정말 딱 자기가 묻고 싶은 말부터 꺼내 놓았다. 늘 그랬듯이.


"진짜 괜찮겠어?"

"오빠 옆에 있는 거 너무 힘들어."


"이젠 사랑한다면 어쩔래?"

"그게 사랑한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질문은 내가 했잖아. 무슨 대답이 그래"

"내 감정이 그렇게 우스워? 지금 오빠가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네네 고맙습니다 돌아갈게요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할지 듣고 나서, 그래 이젠 사랑이다 말하려는 거야 지금? 그래? 어쩜 이렇게 이기적이야? 그만하자."


일어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가 한 마디를 더 했다.


"그래? 그럼 나 다른 사람 만나도 괜찮다 이거지?"

"만나든가 살든가 맘대로 해.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


"그래 알았다."


기숙사로 돌아가며 그 짧은 길 위에서 내가 미쳤지를 수십 번은 되뇌었나 보다. 뭐 들을 말이 있다고, 쪼로로 나가서 이런 기막힌 소리를 듣고 오나 싶었다. 이젠 사랑한다면 어쩔래? 이건 또 뭐야. 다른 사람 만나도 괜찮냐고? 전 이미 만나고 있거든요. 그냥 쫌! 너대로 잘 사세요. 비 맞은 중처럼 중얼대면서.




"야 노안, 첫사랑 못 잊어서 그런 거라며? 그래서 너한테 그런 거라며?"

"무슨 말이야? 앞 뒤 없이"


"노안 우체국 여직원이랑 사귄다는 소문이 쫙 놨어. 너 못 들었어?"

"아 그래.... 나랑 헤어졌어. 누굴 만나든 뭐.... 내가 뭐라 할 일은 아니지 뭐..."


"누가 너랑 헤어진 걸 몰라? 와 진짜 재수 없다. 너랑 헤어진 지 얼마 됐다고, 아니 첫사랑 때문에 너한테 마음 못주는 양 굴더니 뭐냐고. 기가 막힌다"


며칠 후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에 그래 이미 헤어진 사람이 누굴 만나건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속내는 뒤집어졌다. 그 질문이 이런 거였어?  나한테 허락받으러 온 거였어? 기가 막혔다. 나 또한 이미 다른 연애를 시작하고 있으면서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이토록 얄팍하고, 가벼운 것이었나 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도 컸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내 일생 최고의 똘끼를 부리게 된다. 일단 새로운 연애 이야기부터 해보자.




소개팅으로 만난 오비씨. 오비는 아이 같았다. 감정을 숨기거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생각날 때마다 삐삐를 치고, 음성을 남겼다. 보고 싶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 했다. 공일오비와 토이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직접 부른 노래를 음성메시지에 남겨놓기도 했다. 당시 공군 하사관이었던 터라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기에 전화 속 오비는 더 달콤했다. 사랑한다는 말은커녕 예쁘다는 말 조차도 아꼈던 노안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감정의 선물이었다.  아! 연애가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애쓰지 않아도 얻어지는 사랑의 말들은 하나도 달콤하지 않았다. 아, 노예는 풀어줘도 노예근성을 못 버린다더니 내가 꼭 그 짝인 건가 싶었다. 그렇게 듣고 싶어 했던 말이잖아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 자체가 아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주체였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으라더니 개뿔, 노안의 옆에 있는 우체국녀가 내 옆에 있는 오비가 내 감정의 무게와 빛깔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딱 그때였다. 새로운 연애도 끝내야겠다 마음먹었던 그때, 노안으로부터 뜬금없는 연락이 왔다.


"너 내 증명사진 가지고 있지?"

"....... 왜?"


"내일 뭐 원서 낼 게 있는데 사진 찍어놓은 게 없어서, 나 지금 기숙사 앞이니까 가지고 좀 나와."

"....... 알았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증명사진은 물론, 옷을 제대로 챙겨 입고, 가방을 싸들고 기숙사를 나섰다.  기숙사 앞에 세워져 있는 노안의 차에 올라탓다. 


"증명사진 주기 전에 나도 뭐 좀 묻자."

"뭐?"


"우체국 여직원이랑 만나?"

"만나기야 매일 만나지. 고시반 하고 우체국 하고 바로 옆에 붙어 있으니까. 그건 왜?"


"왜 말길 못 알아듣는 척해? 두 사람 사귀는 사이냐고 묻는 거잖아."

"그걸 내가 왜 대답해야 하는 건데. 사진이나 줘."


"싫어. 대답해."

"왜 이래? 나 싫다고 돌아서 갈 땐 언제고 지금 와서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니가 다른 사람 만나도 된다며?"


"상관있어. 말해."

"싫어. 사진 주기 싫음 그냥 내려."


"싫어. 안 내려"

"내려"


대답해라. 싫다. 내려라. 싫다. 한 참 옥신각신 했나 보다. 


"니 마음대로 해. 난 지금 서울로 출발할 거니까. 내릴 거면 지금 내려."

"대답 듣기 전까지는 안 내려."


왜 그랬을까 둘 다. 그냥 대답했으면 될 일이고,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결국 차는 출발했고, 나는 내리지 않겠다며 계속 버티고 있었다. 말없는 침묵의 시간이 20분 정도 흘렀을까 고속도로에 접어들고 나서 내가 먼저 입을 뗐다.


"그때 했던 말 무슨 의미야?"

"무슨 말?"


"이제는 사랑한다는 말."

"잊어버려."


"무슨 뜻이었냐고 묻잖아. 대답해"

"오늘 왜 이래? 내릴래?"


"난 이해가 안가. 왜 나에게 와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되는지 나에게 물었는지"

"대답할 마음 없어. 내려"


"진심이야? 나 내려?"

"어 진심이야. 알아서 내려."


드라마 설정 아니다. 늦은 밤 고속도로를 100km로 달리던 차에서 알아서 내리라는 말에 나는 또 오기와 함께 똘끼가 발동했다. 노안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어리석고 바보 같은 나였지만 한 번 꼭지가 돌면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똘끼가 충만한 나였다. 그 똘끼가 툭 튀어 올라오고 말았다.


"오빠는 내가 바보 같지? 그냥 무슨 말을 막 해도 될 거 같지? 그래 알았어 내릴게 내려줄게."

"맘대로 해라."


차문을 열었다. 공기 저항 때문에 확 열어 제칠 순 없었지만 딸깍 차 문이 열리는 소리와 계기판에 문 열림 빨간 불이 반짝 들어왔을 때 노안은 이미 공황상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문 닫아! 왜 이래 미쳤어?"

"내리라며, 내려줄게. 나 없이 잘살아. 사라져 줄 테니까~!"


"알았어 대답할 테니까 차 문 먼저 닫아."

"약속해 대답한다고 다 말한다고."


"알았다잖아. 얼른!"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갓길에 멈춰 섰다.  놀란 노안과 떨고 있는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똘끼가 발동해 문을 열었지만, 짧은 순간 둘을 스쳐간 광기 같은 것이 입을 열 수 없게 만들었다.


"미안해. 잘못했다. 나 그 여자랑 안 사귀어....... 사랑해. 이젠 사랑하니까 헤어지지 말자."


2년이 훌쩍 넘어 듣게 된 사랑한다는 말에 울음이 안 터짐 사람이 아닌 상황, 울었다. 엉엉. 둘이 드라마처럼 부둥켜안고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지만 그때의 나는 누구보다 로맨틱한 드라마의 주인공이었고, 뜨거웠고, 사랑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달라질까? 그건 잘 모르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노안과 우체국 여직원의 사이는 다소 과장되게 난 소문이었고, 소문의 주체는 노안 자신이었다. 노안은 아직도 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연애 소문으로 맞불작전을 놓았던 게다. 자기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소문을 들으면 노안이 그랬듯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쉽게 걸려들 줄 알았는데 너무 오래 반응이 없어 증명사진을 가져다 달라는 억지를 부렸다더라. 여하튼 나는 걸려들었다. 차에 태워 서울로 가서 다시 만나자 하려던 노안의 계획에 똘끼가 차오른 내가 차문을 열고 협박하는 상황은 전혀 고려된 바가 없었으니 꽤나 놀란 눈치였다. 


여하튼, 우리는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2번의 이별 후 약속한다. 헤어지자는 말 다시는 하지 말자고.

그렇지만 어디 그게 되나, 우린 또 이별을 말하고, 끝내 헤어졌는걸~

다음회에서는 정말 끝짱 난 3번째 이별 이야기가 기다린다.





다음 편에 계속  






번외 이야기

그래서 미안하게도 오비는 두 번째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왜 헤어지자고 하는 건지 묻는 오비에게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씁쓸하게 그냥 거짓말하지 그랬니라고 말하던 오비의 표정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러나, 이 분이 자매 모두에게 반했다고 말했다는 건 안 비밀. 입에 사탕 발린 이야기를 그리도 잘 하시더니, 결국 그는 헤픈 남자였어! 도대체 언니는 왜 나에게 오비를 소개해준 걸까? 아직도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CC와 JJ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