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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Aug 15. 2016

CC와 JJ

 상처의 역사, 첫사랑 #4

"노안이랑 무슨 사이?"

"네? 아... 오빠한테 물어보세요?


노안이 나를 친구 결혼식에 데려갔고, 첫사랑 이후 처음 동창들 모임 자리에 다른 여자를 데려간 터라 다들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그중에서 젤 나대게 생긴 뺀질이가 질문을 던졌다. 뭐가 부끄러웠는지, 왜 저 남자가 내 남자다 말을 못 하였을까?


"노안아, 여기랑 무슨 사이? 친구 결혼식에 데려올 정도면 CC?

"CC는 무슨~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동생이야~."


자자, 모두 여기서 어라 이 새끼 봐라?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더니 좋다고 따라다니는 동생? 개. 자. 식.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 그래? 그럼 JJ네"

"JJ는 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려드리기 전에, 이날 내 몰골을 설명해보자. 금요일 밤, 미리 약속도 없이 집에 보내기 싫다며 생떼를 부리는 노안을 물리치지 못한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외박을 했더랬다. 다음 날, 평소 화장을 잘 안 하던 때라 화장품도 없어서 맨얼굴, 이날 따라 렌즈도 두고와 두툼한 뿔테 안경을 썼다. 게다가 카고 바지가 유행하던 때였는데 한 술 더 떠서 멜빵 카고 바지에 티셔츠, 그위에 얼어 죽지 않을 거 같은 두꺼운 외투를 입으니 예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듯한 그런 몰골이었다. 그런 몰골의 나에게 늦잠을 자는 바람에 데려다 줄 시간이 없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좋은 데 가자고. 가는 길에 나를 차에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집에 들어가 양복에 구두를 신고 나타나더라. 그리고 간 데가 고교 동창의 결혼식장, 이 꼴로 어떻게 들어가냐고 기겁을 하니 한다는 말이 이렇다. 


"너 뷔페 좋아하잖아? 얘네 오늘 뷔페래. 그리고 오늘 누가 너한테 신경 쓰겠냐? 걱정 마 걱정 마."


그러더니 본인이 사회를 봐야 하니 가방과 외투를 좀 들고 있으라더라. 그래 죽은 듯이 있다가 나오자고 했지만 잘 차려입은 사람들 속 너무나 후리한(후줄근하고 자유분방한) 차림이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에게 외투를 맡기고 사라지니 노안 동창들의 레이다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었던 것.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날 좋다고 따라다니는 동생'의 기분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더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대답은 잠시 후 공개됩니다. 악마의 편집? 이런 대접은 기실 이날 만이 아니었다. 




다시 만나기 시작한 다음 해 여름, 노안의 군대 동기 커플과 피서를 떠났다. 종종 함께 만나 더블데이트를 하던 커플이라 편하기도 했고, 커플끼리 여행까지 간다니 뭔가 인정받는 느낌이랄까? 여행지는 거제도, 여행 날짜가 정해지고 방학 내내 하던 아르바이트를 여행을 위해 뺏다. 꿈으로 부푼 커플 여행, 그러나 출발 당일 사달이 났다.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 점심으로 먹은 닭고기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식중독에 걸린 것이다. 차를 타고 한 참을 가서야 식중독에 걸린 걸 알았다. 휴게소에 들러서 먹은 우동이 다음 휴게소에서 그대로 장을 통과해 변기로 떨어지는 걸 보고서야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직감했다. 일단 숨겼다. 최대한 적게 먹고, 물도 안 마시고 버텼건만 통영과 충무를 지나며 몇 개 주워 먹은 충무김밥이 온 장을 뒤집어 놓았다. 식은땀이 줄줄 날 만큼 화장실이 급했다. 거제도에 도착해 화장실을 찾는 사이, 내 일생 최대의 흑역사가 벌어졌다. 

그래...... 농담 아니고 똥 쌌다. 불가항력, 하얗게 질려서 끝장났음을 직감하는 순간 일은 벌어졌다. 드라마, 그것도 시트콤에나 나오는 거잖아. 첫사랑 오빠와 고대하던 첫여름휴가를 왔는데 바지에 똥 싸는 설정! 결국 일단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최대한 빨리 뛰어들었고(사실 뛸 수가 없었다.) 옷과 속옷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변기물로 잔해를 헹궈낸 적 없음 인생을 말하지 말지어다. 어찌어찌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냄새는 어쩔 건데. 좁은 화장실에서 처참한 몰골로 나와 쭈뼛쭈뼛 오빠에게 속삭였다. 


"오빠, 나 식중독 걸린 거 같아. 약국 좀 다녀오자."

"뭐? 식중독? 뭘 먹고 돌아다닌 거야? 여행 오는데 조심했어야지. 하여간 참. 그냥 좀 참아봐."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약 먹어야 할 거 같아. 지사제라도."

"야... 너 지금... 이 냄새... 아놔..... "


약을 사러 시내로 향하는 내내 뭘 먹은 거냐, 정신이 있냐 없냐, 상한 거 같았음 먹지를 말았어야지, 왜 이렇게 미련하냐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내가 얼마나 무안한지, 얼마나 속상한지, 그리고 얼마나 죽고 싶은지 노안은 조금의 배려도 없었다. 나로 인해 여행이 망쳐질까 그 걱정뿐이더라. 결국 여행기간 내내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음식은 물론 찬 물도 마시지 말라고 해서 불볕더위에 미지근한 물로 버텼다. 물에도 들어가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길 동안 모래사장에 앉아 탈진 직전의 몸을 이끌고 눈물을 꾹꾹 참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회도 그림의 떡이 되고 저녁 시간 맥주 한 잔의 수다도 맹물로 대신했다. 간간히 이어지는 노안의 핀잔과 잔소리도 받아내야 했음은 물론이다. 드디어 서울로 향하는 날, 서러움이 목까지 차올랐다. 


"음악 꺼 시끄럽잖아."

"난 듣고 싶은데 왜.... "


노안이 툭, 라디오를 껐다. 한 번도 부려본 적 없는 오기가 슬 발동했다. 

툭, 라디오를 켯다. 


"끄라고."

"음악 듣고 싶다고"


꺼진 라디오를 틀었지만 다시 꺼졌다.


"왜 이래. 내가 듣기 싫다잖아."

"내가 듣고 싶다잖아. 큰 거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음악 좀 듣고 싶다는데 이래야 해?"


"운전하는데 방해돼. 내 차야, 운전하는 사람이 왕인 거 몰라?"


이렇게 되지도 않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뒷좌석에 사람이 있었다는 거. 듣다 못한 언니가 말을 꺼냈다. 


"노안씨 나도 음악 듣고 싶은데 들으면 안돼요? 적적하잖아~"

"아 그래요? 에이 그럼 진작 말을 하지!"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나는 그렇지는 않더라. 그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쉽게 나를 막대하는 사람에게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받았다. 모란에 살던 커플을 먼저 내려주기로 하고 내 속이 많이 나아진 거 같으니 저녁을 먹고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나에게 언니가 물었다.


"주영, 뭐 먹고 싶어?"

"음...... 칡냉면 먹고 싶어요. 언니네 집 근처 지난번 갔던 그 집 맛나던데, 괜찮을까요?"


"야야~ 식중독 좀 나아진 지 얼마나 됐다고 칡냉면이야. 그냥 집에가"

"나 며칠 미지근한 물이랑 죽만 먹어서 시원한 게 먹고 싶은데 먹고 가면 안돼?"


"왜? 가다가 또 차 세워달라고 하려고? 안돼 안돼."

"노안씨, 칡냉면 집에 다른 것도 있잖아. 다른 따뜻한 거 먹고 칡냉면은 맛만 봐. 그래도 되지머~"


"너 때문에 다들 신경 쓰고 고생했는데 마지막까지 얼마나 더 번거롭게 하려고 이래. 됐어 그냥 가."


혹 또 탈 날까 걱정하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노안의 뉘앙스는 걱정과 멀었다. 그런 뉘앙스를 언니도 눈치챘는지 결국 등신 같은 나 대신 언니가 폭발하고 말았다. 


"노안씨, 정말 너무하네. 웬만하면 둘 사이 일이니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건 좀 아니다. 주영이가 아프고 싶어 아픈 것도 아니고. 딴에는 우리 배려하느라 내내 애쓰는 게 눈에 보이는데,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먹고 싶다잖아. 며칠 만에 처음 먹고 싶은 거 말하는데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해? 그럼 우리 내려주고 가요. 우리가 먹여서 차 태워 보낼 테니."

"아니, 난 걱정돼서 그런 거죠. 또 탈 날까 봐."


"그럼 말을 곱게 하든가. 듣는 우리가 다 민망한데, 주영이는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난 그런 뜻이 아닌데, 내가 말을 곱게 못 하잖아요. 오해야 오해, 그래 먹자 먹어 칡냉면!"


결국 먹었다 칡냉면. 결국 집에 돌아와 다 게워내고 앓아누웠지만 말이다. 이젠 사랑할 수도 있다고 했던 노안에게 나는 그냥 딱! 그 정도의 존재였다는 걸 확인받은 날이다.  다시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아직은 할 수도 있는 단계, 사랑은 아닌가 보다 조금 더 마음을 다하자, 자신을 다독였다는 바보의 전설. 




다시 결혼식으로 돌아가자. 엄청 후리한 복장의 내 존재의 의미를 궁금해하던 노안의 고교 동창들에게 노안이 답한다.


"CC는 무슨~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동생이야~."

"아 그래? 그럼 JJ네"


"JJ는 뭐냐?"

"잡놈잡년!"


일동 박장대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기가 막혔다. 이런 상황에 그들과 함께 웃고 있는 노안을 어째야 하나. 거기서 박차고 나왔어야 하는데 생각이 오지게 많은 나는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박차고 나오면 나로 인해 노안이 곤란해질까 봐 꾹 참았다. 그런 나를 끌고 노안은 피로연까지 갔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숨죽이고 있자니 누군가 내 손목을 끈다. 


"요즘 애기들은 뭐하고 노나? 한 곡 해봐. 재롱잔치 좀 보자."


이 뺀질이 자식, 꼴랑 7살 많은 것들이 나더러 애기란다. 재롱잔치? 깊은 빡침이 심연으로부터 올라와 나를 돌게 만들었다. 그래 후리한 빠숑의 후리스타일 가무를 보여주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자리를 지키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 박진영의 "날 떠나지 마"를 댄스까지 보태서 무대를 휘저었다. 항상 하던 짓이 아니니 보는 사람들은 웃겨서 쓰러졌지만, 노안은 똥 씹은 표정이 돼서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나를 끌어냈다. 


"미쳤어?"

"어 미쳤다."


"어라? 많이 컸다."

"원래 컸다!"


"너 나중에 보자."

"그러시든가."


술자리가 끝나고 만취한 노안은 운전을 할 수 없어 모텔 신세를 졌다. 결혼식도 경기도 어디 이름도 알 수 없는 동네라 혼자 집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방음은 1도 안 되는 모텔의 낭자한 신음소리와 술에 절어 쓰러진 노안의 옆에서 밤은 깊어갔다. 문득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노안의 재킷을 뒤져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딱 보이는 사진 한 장. 지갑 속에는 아직도 첫사랑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시 만난 지 1년이 지났지만 노안은 여전히 그녀의 사진을 지갑에 품고 심장에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있었구나 싶으니 눈물이 뚝 떨어졌다. 잠 한 숨 못 자고 사진 속에서 환히 웃는 그녀와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밝고 노안이 눈을 떴다. 인내심의 한계, 나는 아침에 눈을 뜬 노안에게 헤어지자고 했고, 노안은 눈뜨자마자 그런 소리를 한다고 화를 냈지만 그 방을 나서면 또다시 노안을 용서할 거 같아서, 지금 이 분노의 힘으로 이별을 말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왜 아직도 당신의 지갑 속에 그녀의 사진이 들어있는지 물었지만 속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묵묵부답 입을 다문 노안에게 더는 못 견디겠다는 말과 함께 뒤돌아섰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노안과 두 번째 이별을 했다. 




두 번째 이별을 고하고 소개팅을 했다. 이별에 정신 못 차리는 동생이 안쓰러웠는지 언니가 직접 소개팅을 주선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강남역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그곳에서 먼저와 날 기다리고 있던 오비를 만났다. (오비는 공일오비의 오비임, 공일오비 노래를 잘 불렀음) 검은 원피스에 붉은 립스틱을 바른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오비와 그날로 바로 1일로 돌입한다. 사랑은 사랑으로 지운다는 썩스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라는 정여사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한테 반했다잖아. 키는 작지만 이만하면 반반하게 잘 생겼고, 노래도 잘하고, 아이같이 천진난만하게 웃는 나쁘지 않았다. 사실 그때의 나는 노안이 나를 찾아와 또 잡으면 난 또... 그럴 거라고 또, 무너지고 말 꺼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면, 다시는 그에게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과연? 





다음 편에 계속  






번외이야기

요게 없으면 섭섭하잖소? 우리와 함께 종종 커플 데이트를 즐기던 커플은 오래오래 예쁘게 연애하다가 결혼에 골인했다. 모 항공사의 기장과 모 학습지 선생님의 결혼, 아이도 낳고 알콩달콩 잘 산다고 들었다. 두 사람은 늘 날 아껴줬다. 함께 만날 때면 날 챙겨주던 언니, 그 언니가 기회가 날 때마다 괜찮냐 물었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내가 헤어졌다고 했을 때, 잘했다고, 늘 헤어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하더라. 내 동생이었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떼어놨을 거라고. 노안이랑 먼저 알았고 연인의 친구 애인이라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남았다고. 지금 그 언니는 잘 지내고 계시려나, 언니 보고파요! 지금은 어찌 지내고 계신지 난 요즘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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