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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Aug 11. 2016

사랑할 수도
있을 거 같아.

희망고문, 첫사랑 #3

"어 누구....? 아!"

2학년 2학기 개강 첫날, 선배들의 반응이었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고, 화장을 하고 굵은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를 늘어뜨렸다. 가슴팍이 푹 파인 쫄티에 나팔 청바지, 10센티 통굽 신발까지 신으니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았다. 돌아온 교정에서 첫눈에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행동도 바꿨다. 출석 장학생이었던 내가 땡땡이를 치기 시작했다. 낮술도 마시고, 포켓볼도 배웠다. 금요일 저녁에는 동기들과 스쿨버스를 타고 강남에 내려 술 한 잔에 거한 수다도 떨었다. 전보다 돈을 더 많이 쓰는 거 같은데 신기하게도 덜 가난했고 단짝 패거리들도 생겼다. 짝사랑을 쫑냈더니 전혀 다른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파격적으로 달라진 일상은 나의 과거를 1도 모르는 편입생과의 썸이었다. 단짝 친구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연애고자 갱생 작전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졌다. 단짝 패거리들은 어디서들 정보를 입수했는지 편입생 중 경상북도 영주에서 올라온 금수저 하나를 점찍었다.  썩스라고 불렸던 연애 도사 녀석이 남자는 남자로 지우는 법이라며 가장 적극적으로 나를 밀어붙였고, 썩스의 여자 친구이었던 정여사는 수업시간표, 동선, 주거지, 취향, 습관 같은 자잘한 정보들을 빠르게 물어 날랐다. 크래이지고양은 학교 생활하는데 필요한 잡다한 것들을 공유해줘 가며 영주금수저를 우리 패거리로 흡수시켰다. 


어느 사이 영주금수저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첫 수업 시작 전 함께 아침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몰려다니긴 했어도 내 옆자리는 항상 영주금수저 차지였다. 털털한 성격에 찰진 경상도 사투리, 게다가 있는 집 자식이 내뿜는 여유로움까지 영주금수저는 노안과는 다른 세계의 남자였다. 간혹 달달한 눈빛을 보내는 영주금수저의 멀끔한 외모도 싫지 않았음도 고백하자. 그래 연애 뭐 별거 있나, 이러다가 사귀고, 이러다가 다른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거지 싶었다. 

 

나의 변신과 썸에 노안이 흔들렸냐고?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안은 심히 흔들렸다. 아니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존재감 없던 여자사람동생의 이야기가 자꾸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저 들리기만 하면 좋을 텐데 자꾸 눈앞에 알짱거렸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죄다 똑같이 시간표를 짠 덕에 마주치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어떤 녀석이 줄기차게 함께 눈에 띄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둘이 사귄다나? 그토록 눈물겨운 이별을 고하던 게 고작 한 달 전인데 벌써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거야? 분하기도 했단다. 그렇다, 나는 본의 아니게 질투작전을 시전 중이었고, 노안은 걸려들었다.




개강한지 두 달 남짓이 되었을 때 연락이 왔다. 마주쳐도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는, 눈이 마주쳐도 짐짓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마는 나에게 노안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삐삐로 연락이 되지 않자 기숙사 방으로 직접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기숙사 선후배들 손에 쪽지를 들려 보내기도 했다. 어떤 연락에도 답을 하지 않는 날들이 지나갔다. 수업시간에는 조금 늦게 들어가 조금 일찍 사라지는 신공을 부렸다. 나에게 말 붙일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어느 밤,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음성메시지와 쪽지가 전해졌다. 기숙사 방 전화기 선을 뽑아버렸더니 마주치는 사람마다 붙들고 날 불러달라고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밤이 깊어가도 기숙사 앞에서 떠나지 않는 않는 노안의 차를 창 너머 훔쳐보며 날이 밝았다. 그 날 아침, 어느 때보다 정성스레 화장을 하고 옷을 챙겨 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그 앞을 밤사이 훌쩍 더 늙어버린 노안이 막아섰다.


"얘기 좀 하자."

"난 할 말 없어. 비켜."


"너랑 이야기하려고 밤새 기다렸어."

"누가 기다리래? 왜 안 하던 짓을 해? 나 수업 늦었어. "


"너 왜 이러니. 이야기 좀 들어봐. 응?'

"그래? 그럼 여기서 해. 난 오빠랑 단둘이 어디 가기 싫으니까. 여기서 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러니까..... 조금만 시간 내서 이야기하자."

"뭘 잘못했는데? 오빠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나한테 막말한 거? 오빠가 원할 때만 날 찾은 거?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무시한 거? 동생으로 좋아한다고 말장난 친 거? 내 마음 뻔히 알면서도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받아주지도 않으면서 희망 고문한 거? 아니. 오빠가 제일 잘못한 건 내가 이젠 다시는 그 누구도 그토록 사랑할 수 없게 만든 거야.  평생 또다시 이만큼 순수하게 누굴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인생에 단 한 번 있는 첫사랑이 오빠였다는 게 너무 화나고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해. 사랑받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진심을 다한 내가 너무 불쌍해. 오빠를 만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일이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사랑이면 이 세상 무엇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도 산산조각이 났어. 오빠가 그걸 알아? 뭘 잘못했는지 안다고? 안다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노안은 말문이 막혔고, 나는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수업은 무슨, 발길을 돌려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 울고 또 울었다. 노안도 기숙사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차 안에서 하루를 보냈다.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선배가 또 전언을 가지고 왔다. 


"그 사람 아직도 기숙사 앞에 있던데....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고 전해달라는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노안의 차를 두드렸다. 나를 태운 차는 학교를 벗어나, 내가 좋아하던 드라이브 코스를 지나 멈췄다. 


"미안하다. 말도 안 되게 내가 어떻게 해도 너는 내 옆에 있을 거라고 믿었나 봐. 듣기 좋은 소리도 입에 발린 말도 못 하지만 너는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널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몰랐어. 미안하다.. 정말."

"...... 그래서?"


"용서해줄래?"

"내가 용서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그 전처럼 지내자...... "

"그 전처럼 지내자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사.... 귀....... 자..고"

"왜? 나랑 왜 사귀자고 하는 건데? 나한테 갖고 있는 감정이 뭐야? 좋아하는 동생? 더 이상은 싫어. "


"그런 건 아니야.... "

"그럼 나 사랑해?"


"........."

"거봐 대답 못하잖아. 서로 다른 감정으로 어떻게 만나? 난 싫어."


"사랑하....ㄹ.... 수도 있을 거 같아."

"뭐라고?"


"이젠 널 사랑할 수도 있을 거 같다고......"




그래, 그에게는 질긴 첫사랑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만나 가장 풋풋하던 20대 초반의 모든 기억을 함께한 그녀. 노안의 모든 처음은 첫사랑 그녀와 함께였다. 그가 군대를 간 사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이미 아이까지 낳은 그녀를 노안은 잊지 못했다. 입버릇처럼 그녀 이야기를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가 가진 옅은 쌍꺼풀과 깊게 패이는 볼우물이 부러웠다. 나와는 다르게 의상학과 출신이라 옷맵시를 제대로 낸다는 이야기도, 나와는 전혀 다른 체형으로 낭창낭창 그토록 여성스럽다는 칭찬도 수없이 해댔다. 화가 나기보다는 부러웠다. 헤어진 지 3년이 지났어도 노안의 지갑 속에서 아직도 웃고 있는 그녀가 참 부러웠다. 혹여나 길 가다가 마주친다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내 마음을 밀어낼 때마다 노안은 첫사랑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스무 살의 등신 김주영은 그마저도 로맨틱해 보였다. 한 사람을 향해 저토록 한결같은 마음을 지킬 수 있다니 오히려 멋져 보였다. 이것 또한 희망고문의 한 가지 버전이었음을 그땐 몰랐다. 


여기에 너로 인해 그녀를 잊고 이제는 새로운 사랑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말을 들었으니 결과는 어이없게도 당연히 당신이 생각하는 그거 맞다. 





사랑한다는 말도 아니고 사랑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말로 나는 접었던 마음을 활짝 폈다. 더 화알짝! 살살 분홍빛 물들듯 썸을 타던 영주금수저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갱생작전에 매진하던 단짝 패거리들은 나에게 불치병 판정을 내렸다. 에라이 욕을 하면서도 나의 사랑을 응원해주는 고마운 친구들로 남았다. 영주금수저까지 말이다. 그렇게 모두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사랑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말은 저 너머 어디엔가 행복이 넘실 댄다고 믿게 하고, 저 너머로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전보다 더 극진히 마음을 다했다. 이 얼마나 영악한 사태인가! 


그렇게 또 1년이 흘렀다. 1년 후 우린 또 한 번의 이별을 한다. 왜? 개버릇 남 못주니까!




다음 편에 계속






번외 이야기

성격 좋은 영주금수저는 뒤늦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둘이 진하게 술 한 잔 기울이며 진한 사과를 전했다. 본의 아니게 널 이용하게 돼버려 미안하다고. 아 이 쿨한 자식, "그냥 니랑 나랑 인연이 아닌 거지 뭐. 됐다!"하더니 "나쁜 남자 좋아하지 마라. 니 팔자 사나워진다. 세상에 좋은 남자 많아." 하며 픽 웃는데 아 내가 미친년이지 싶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영주금수저의 전 여자 친구는 무려 미스경북진! 그런데 참 나쁜 여자였더라. 영주금수저의 러브스토리도 참 절절했는데 나중에 그 이야기도 한 번 풀어보겠다. 그리고 영주금수저가 남긴 한 마디. "넌 참 좋은 사람 맞는 거 같은데...니 스스로한테도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다른 사람한테만 잘하지 말고, 니한테 좀 잘해라 가스나야!" 그때 왜 내가 영주금수저와의 썸을 버리고 사랑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에 홀렸는지 정말 미스터리다. 난 지금도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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