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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Aug 06. 2016

마음으로
마음을 얻는 일

내기와 오기, 첫사랑 #2

무료했다. 또 한 번 신입생이라니, 7년이나 차이나는 꼬맹이들과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기도, 체신머리 없이 농담 따먹기를 하기도 뭐하다고 생각했단다. 그래 봐야 고작 27살이면서.  무료한 또 한 명이 있었다. 모시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삼수생. 어린것들이 동기랍시고 하는 반말도 듣기 싫고, 남다른 입성을 대놓고 훑어대는 것도 불편했다. 그래 봐야 고작 23살이면서. 그렇게 무료한 둘이 도서관에서 만났다. 노안과 노심(心)이라고 해야 하나, 이 노노 커플은 무료함을 달랠 무언가를 찾다가 나. 를. 발견했다. 


"쟤는 뭐냐? 뭔데 일 학년이 매일 도서관에 와서 사냐?"

"그러게요. 말도 별로 없고, 친구도 없는 거 같아요. 기숙사에 있다던데?"


".... 심심한데 내기 하나 할래?"

"네? 뭔 내기요?"


"쟤한테 에버랜드 가자고 해서 먼저 OK 받아내는 사람한테 모든 경비 쏘기. 어때?"

"뭔 유치하게 에버랜드예요.. 그리고 형, 형은 나한테 안되지. 승산 없는 도전을 하십니까~?"


"야야! 니가 이 형의 매력을 모르는구나? 내가 걸어서 안 넘어오는 여자 없다."

"형, 형이 이기면 에버랜드 자유이용권, 경비, A부터 Z까지 다 책임지고 거기에 내 손에 장을 지집니다."


"그럼 너 콜한 거다? 오래 끌면 재미없으니까 날짜 박자, 10월 31일 전에 OK 받기 어때?"

"그러시든가~ 형 참 무모하시네."


무료하고 심심한, 어린것들 사이에 섞이기 뭐해서 도서관에서 상주하던 두 남자가 도서관 옥상에서 심심풀이 땅콩 삼아 시작한 내기가 그 모든 친절의 이유였다. 

 

몰랐다. 꿈에도 심심풀이 땅콩 삼아 시작한 내기, 날 좋은 가을날 여자 사람이랑 에버랜드에 가고 싶다는 시답지 않은 소망에 내가 사용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삼수생 노심 씨가 이 기막힌 고백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계속 읽어보시라~!




'오빠가 너 좋아하는 알지?'에 동.생.으.로. 네 글자를 더 붙여 확인받던 날, 나는 오기를 부렸다. 오빠가 날 여자로 좋아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난감하게도 방법을 전혀 몰랐다. 그저 온 마음을 다해, 온몸을 바쳐 마음을 전하면 되는 줄 알았다. 마음으로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리포트를 대신 썼다. 시험기간이 되면  족보를 모으고 노트 내용을 깨알같이 정리해 바쳤다. 공강이 생기거나 시간이 나면 그의 차를 닦고 닦았다. 사람들이 내 차라고 오해할 정도로. 생일날엔 전지에 가득 편지를 쓰고 없는 생활비를 쪼개 선물을 샀다.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학교로 돌아가는 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그가 좋아했던 김밥을 말고, 직접 만든 아이스 레몬티를 대령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씀씀이가 커졌던 그의 카드빚을 갚아주기도 했다. 물론 카드 대금을 내고 나서 현금서비스를 받아 거의 대부분을 돌려주었지만 그의 재정상태를 뻔히 아는 나니까 그리고 나는 그냥 아는 동생이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나도 쥐꼬리만큼 벌어 쓰는 주제에 함께 밥이라도 먹을라치면 그가 화장실 간 사이에 밥값을 냈다. 


오분 대기조, 그가 부르면 어디든 갔다. 그가 원하면 뭐든지 했다. 나에게 NO라는 단어는 없었다. 언제나 "응 좋아." "응 알았어."가 대답이었고, 당연하게도 그는 그걸 너무 잘 이용했다. 그러니 우리 대화는 늘 통보와 순응의 반복이었다. 그래도 때론 행복했다. 그렇게라도 불러주는 그가 있어서, 내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하자고 최면을 거는 날들이었다. 




그런 나를 죄의식에 가득 차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 삼수생, 내기의 공범 노심씨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내기에 형이 이겼어도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단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미 시작된 마음을 멈출 줄 모르는 모습이 심히 당황스러웠다더라. 그래, 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당신은 이해가 갔을까, 노심씨의 놀라움은 어쩜 당연한 이야기다.


"너 잘 때 겨드랑이나 어깻죽지가 막 가렵지 않냐?"

"응? 그게 뭔 소리야? 


"너 조만간 날개 돋을 거 같아서.."

"왜 날개가 돋아?"


"난 가끔 네가 사람이 아니거나 바보 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의심된다."

"아 자꾸 뭐라는 거야...?"


"넌 그 쭈글탱이 형이 왜 좋냐? 도대체?"

"음.. 글쎄 그냥 좋은데.. 헤.. 나보다 아는 것도 많고, 잘해 줄 땐 엄청 잘해줘."


"어이구... 이 등신아... 형 너 좋아해서 잘해줬던 거 아니야"

"나도 알아.. 동생으로 좋아한다더라.. 근데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 알면 알 수록 막~ 별로야?"


"환장하겠네. 사실은!!!"


이렇게 시작된 고백이 바로 내기였다. 난 다시 한 번 오기로 받아쳤다. 내 사랑의 시작이 시답지 않은 내기라는 걸 알았을 때 화를 내던가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난 바보, 내기였냐고 그런 거였냐고 날뛰어도 모자랄 판에 나는 부탁을 했다.


"오빠, 난 모르는 걸로 해주라. 지금 이야기한 거 난 모르는 걸로..... 해줘 "

"야, 너...... 널 어쩌면 좋냐? 응?"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싶었던 마음, 이미 쏟아온 마음을 돌이길 수 없었던 오기였다. 그러나 나의 오기는 1년이 못되어 동이 났다.  2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오늘 나 좀 만나요. 할 말이 있어요."

"할 말? 전화로 하면 되지 얼마나 대단한 말씀을 하시려고? 지금 말씀하셔."


"얼굴 보고 해야 하는 말이에요. 대학로로 갈게요."

"오빠 힘들다. 주말은 집에서 쉬라고 있는 거야."


"다신 주말에 만나자고 안 할 테니 오늘만 좀 나와주면 안 돼요?"

".... 뭔데 이래? 알았다. 몇 시?"


귀찮다는 그를 불러내 놓고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배고프다는 그와 함께 떡볶이를 먹고 대학로를 걸었다. 그리고 무슨 마음이었는지 빵집에 들어가 하트 모양 쿠키를 샀고,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차 안에서 입을 뗐다. 


"오빠 우리 헤어져요. 아니 제가 그만할게요. 오빠는 나랑 시작한 적도 없으니까 저 혼자 끝내면 되는 거죠? 저 이제 그만할래요. 마음을 다하면, 오빠 마음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나 봐요. 마음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닌가 봐요."

"그래, 잘 생각했다. 그냥 오빠 동생으로 잘 지내자. 그래도 좋잖아. 우리말도 잘 통하고 그렇지?


"아니요. 학교에서 마주치면 모른 척해주세요. 오빠는 나 봐도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을 거 같아요.  그럼 저 갈게요. 저 집에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


차에서 내려 한참을 걸었다. 길바닥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줄줄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걷고 또 걸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물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빛의 속도로. 




남은 방학 난 변하기로 했다. 우습지만 유치하지만 예뻐지는 걸로 복수하고 싶었으니까!!!! 긴 머리를 웨이브로 파마하고, 안경을 벗었다. 그만둔 짝사랑의 이별통을 감내하느라 고맙게 살도 빠졌다. 몸에 붙는 셔츠도 사고 그때 한 창 유행이던 나팔진에 10센티 통굽 구두도 사들였다. 아! 그전까지는 그럼 어떻게 하고 다닌 거냐고? 


흰 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맨얼굴. 청춘 드라마에 나오는 대학생을 상상하면 안 된다. 매우 평범한 하나도 꾸미지 않은 민간인을 생각하시라. 물론 꾸미려는 시도를 전혀 안 했던 것은 아니다. 


"오빠, 나 귀 뚫을까요?"

"어 그래 뚫어라. 기왕 뚫는 거 통나무 정도는 하나쯤 지나가게 뚫어야 되지 않겠냐?"


"네?"

"뚫지 말라는 소리다. 거 왜 생살을 뚫니?"


"오빠, 머리 한 번 잘라볼까요?"

"어 그래 잘라라. 기왕 자를 거 확 티 나게 밀어버려~"


"네? 진짜요?"

"자르지 말라는 소리야. 넌 좀 가려야 된다."


"오빠, 화장 좀 배워볼까요?"

"어 그래 배워. 기왕 배우는 거 가부끼 화장 정도는 해줘야 화장 좀 했네 하지 않겠냐?


"네? 진짜요?"

"하지 말라는 소리야.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거 아니다."


이런 대화가 오갔다. 믿을 수 없겠지만 실화다. 그래 오빠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이었던 나는 귀도, 화장도, 파마도 포기했다. 그러니 내 몰골은 꾸밈제로. 그 도화지 상태에 머리도 옷도 바꾸고, 화장하고 렌즈 끼고 나니 전혀 달라 보이더라. 말 그대로 변신, 2학기 개강 첫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달라진 모습으로 학교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 편에 계속





번외 이야기

여기서 두 번째 아니러니, 노심은 키 183의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을 가졌다. 게다가 머리숱도 많았지. 꿀을 바른 듯,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마저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또한 나에게 갖은 친절을 베풀었었다. 그렇다면 내가 별로라 하는 진한 쌍꺼풀의 소유자라서? 곱슬머리라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나의 첫사랑 노안 씨도 쌍꺼풀에 곱슬머리였다는 것! 여하튼 한 걸음 물러서서 둘을 놓고 볼 때, 열이면 열 노안보다는 노심을 택했으리라. 난 왜! 도대체 왜 그를 택했던 걸까? 정말 미스터리다. 난 지금도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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