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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Aug 02. 2016

오빠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낯선 감정, 첫사랑 #1

노오란 종이에 쓰인 초록색 한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오빠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모른다고 할 걸 그랬다.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 없지 않냐고 하거나, 알아야 하는 거냐고 되물을 걸. 그도 아니면 어떤 의미로 좋아하는 건데요 따져나 볼 걸 싶었다. 그러나 따져 묻기는커녕 나보다 7살이나 많은 대학 동기가 보낸 애매한 편지 한 통에 겁도 없이 첫사랑은 시작되고 말았다. 




대학교 1학년 20살의 삶은 고달팠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첫 학기 등록금도 빚을 내야 했고, 서울에서 용인까지 통학하기가 어려워 저렴한 기숙사 생활을 택했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장학금을 타기 위해 학과 공부에 매달렸고, 수업시간 이후에는 교학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엠티는커녕 주말이면 놀이공원의 청소며 판매 같은 자잘한 아르바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칙칙하기 이를 데 없는 대학 1년 생, 천식이 심해 숨을 고르느라 말도 많이 하지 못했으니 음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내게, 그가 다가왔다.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는 1학년생은 흔치 않았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뭐든 처음을 만끽하는 시기니까. 어느 가을날, 쏟아지는 햇살처럼 잠도 쏟아지던 도서관의 오후, 잠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찬바람이 일기 시작한 가을이었지만 반짝이는 햇살로 달궈진 도서관은 달콤한 낮잠을 자기 딱 좋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감고 있어도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느낌, 누군가 날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떠야 하나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을 때 그의 커다란 눈과 마주쳤다. 

"커피 한 잔 할래?"

대답할 틈도 없이 끌려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도서관 옥상에서 종이컵에 든 달콤한 커피 한 잔을 받아 들고 있었다. 

"너 경영학과 95학번 맞지?"

"네.... 그걸 어떻게...?"

"나 몰라? 나 같은 과 동기잖아."

도... 동기?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렇게 늙은 동기가 있었어? 

"아 첫날 애들이 나 교수인 줄 알고 인사했는데 기억 안 나?"

"아....!"

그제야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선배, 아니 동기였어? 27살었던 그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승진에 차별받는 이유가 학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4년제 대학에 재입학했단다. 의문스럽게도 편입이라는 제도를 몰라 본의 아니게 수능을 보고 1학년으로 입학했다니, 여하튼 동기였다. 7살 많은 동기. 게다가 노안동기.


7살 많은 아니 노안 동기의 친절은 이 날로 부터였다. 함께 점심을 먹자고 청하고, 도서관에서 짬짬이 함께 커피를 마셨다. 차가 있었던 그는 금요일 밤이면 기숙사에서 서울 집으로 가는 나를 데려다주고, 월요일 아침이면 등굣길에 태워 기숙사 앞에 내려주었다. 차 안에는 항상 듣기 좋은 음악이 흘렀고, 고속도로보다는 예쁜 길로 차를 몰아 숨 막히던 일상을 조금이나마 잊게 해주었다. 스무 살의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동시에 그의 친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내심 좋으면서도 혹여나 상처받고 싶지 않아 마음을 단속했다.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나보다 7살이나 많다고!'

'연애 많이 해봤을 거야. 차도 있고 회사도 다녔으니 따르는 여자도 많을 거고.. 나 같은 꼬맹이를 만나겠어?'

'설사 좋아한다고 치자, 7살이나 많으면 결혼 빨리 해야 할 텐데.... 안되지 안돼!'

아... 이 때는 남자는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잘 몰랐고 김칫국도 혼자 사발로 마셔댔다. 참으로 순수한 영혼이었다. 스무 살의 나는.


그렇게 한 2주 정도 흘렀을까? 도서관 창밖으로 보이는 색은 초록에서 빨갛고 노랗게 변해갔고, 날씨는 기분 좋을 만큼 서늘해졌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기말고사를 보겠구나 했던 그즈음이었다. 도서관 내 책상에 커피와 함께 노란색 봉투 하나가 놓여 있던 건. 봉투를 열었을 때 보았던 한 줄, 그 한 줄이 내 모든 알량한 계산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대답은 '그럼 그럼 알고 말고요! 안다마다요!'였음은 뭐 뻔한 거 아니겠나?


그런데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또 질문을 던져왔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건 당연하다는 듯이.

 

"이번 주말에 에버랜드 갈래? 오빠가 기숙사 앞으로 토요일에 데리러 갈게."


너무 좋아서, 숨이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어 고개만 끄덕였던 기억, 그래 난 쉬운 여자였다. 밀당 같은 건 먹는 건지 입는 건지 모를 정도로. 차로 날 데리러 오는 오빠, 나 보다 뭐든 많이 아는 오빠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첫 데이트를 했다. 달달했던 2주와 첫 데이트, 칙칙하던 일상이 달달 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에버랜드 데이트 이후 그의 행동이 달라졌다. 뭔가 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온도차, 뭘까? 에버랜드에서 내가 뭘 잘못했나? 머리 터지는 고민들이 이어졌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나에게 조금씩 멀어질수록 안달이 났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를 위해 뭘 해야 할지 골몰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느꼈을 때 그에게 물었다.


"오빠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왜?"


"아니... 뭔가 이상해서요. 오빠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아닌데 난 똑같은데 왜?"


".... 오빠가 이젠 날 안 좋아하는 거 같아서요. 오빠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에이... 좋아하지 오빠가 동생으로 얼마나 좋아하는데 무슨 말이야."


"네? 동생으로요? 오빠가 저 좋아하는 거 아냐고 편지 보내셨잖아요?"

"아.... 그거? 그거 오빠가 동생으로 00이를 좋아하는 거 아냐는 의미였지~ 왜? 몰랐어?"


"에버랜드가서도 제 손 잡고 다니셨잖아요? 

 그날 저 데려다 주시면서 키스도 했잖아요? 그건 다 뭐예요?"

"오빠가 동생 손도 못잡아? 오빠가 예뻐서 뽀뽀해준거지."


뭔가 한 대 맞은 기분이 이런 거구나 깨달았다. 그때 침 세 번 뱉고 끝냈어야 했다. 어떤 오빠가 동생 입술에 키스는 고사하고 뽀뽀를 하니 세게 따귀 한 대 날려 줬어야 했다. 그런데 스무살의 나는 오기를 부렸다. 나는 남자로서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오빠가 절 좋아하게 만들겠다며 다짐했다. 그리고 내 찌질한 첫사랑 아니 짝사랑 역사가 시작되었다. 


왜 그때 그가 그런 편지를 썼는지, 친절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 건 나의 애달픈 짝사랑에 죄책감을 느낀 그의 공범이 자수하면서 였다. 



다음 편에 계속




번외 이야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이 있다. 그의 키는 176, 몸은 날씬한 편 여기까지는 뭐 평범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다음. 동기들이 선배가 아니라 교수로 오인할 정도의 노안, 게다가 탈모가 시작되고 있었다. 성격?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성격도 지랄 맞았다. 출중한 외모도 어른다운 성품도 지니지 못했던 그 사람을 사랑했던 이유가 뭘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난 지금도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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