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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Sep 06. 2016

같은 시간,
다른 사랑.

마지막 이야기, 첫사랑 #7

5년 만이었다. 

차가운 버스 유리창에 기대어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린 뒤 만 5년 만에 노안에게서 연락이 왔다. 숨이 끊어질 듯 울었던 시간도, 분노에 떨며 저주를 퍼붓던 시간도 추억으로 곱게 넣어둘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동문회 주소록을 뒤져 보낸 메일은 길지 않았다. 잘 지내냐는 인사,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질문... 그리고 한 번쯤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로 끝맺음이 났다. 


그 시절의 나는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고, 3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고, 남자 친구와 헤어졌고, 스토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나쁜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댔다. 그때 날아든 노안의 메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요즘 말로 1도 중요하지 않은 그런 것, 무심코 메일을 열었다가, 별.....이라는 소리와 함께 별생각 없이 닫아버린 작은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며칠 후 걸려온 전화 한 통


"나야"

"어? 나? 니가 누구신대요?"


"벌써 내 목소리도 까먹었어?"

"...... 내가 기억해야 하는 목소리인가요?"


말하는 순간 기억이 툭 튀어 올라왔다. 늘 전화하면 노안이 하던 첫 대사. 나야.


"혹... 시 노안오빠?"

"야~~~ 그렇지 그렇지! 뭐해?"


"어머, 오빠는 무슨 지난주에 연락했던 사람처럼 말한다? 누가 들음 절친인 줄 알겠어."

"반가우면 반갑다고 말을 하면 되지 딴소리는."


마치 이웃집 오빠처럼 한없이 가볍게 전화를 걸어서는 만나자고 했다. 거제도로 여행을 떠났던 그 커플도 날 궁금해하고, 자신도 내가 뭐하며 사나 연락하고 살고 싶다며 넷이 만나자며 시답지 않은 수다를 떨었다. 나도 궁금했다. 5년이 지난 노안은 어떤 모습일까? 그때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기도 했다. 그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며칠 후 내가 당시 자주 가던 술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5년 만에 마주 앉았다. 

어떤 노래 가사처럼 살아가는 얘기, 변한 이야기, 지루했던 날씨 이야기로 한 참을 떠들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노안의 이야기 속에는 결혼이 없었다. 혼자 사는 사람의 뉘앙스랄까? 나는 이미 노안이 결혼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계속 맞장구를 쳤다가는 거짓말을 듣게 될 거 같아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참! 오빠 결혼했다면서? 3년 전인가? 경영학과 여자 동기들 모임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오빠 결혼식 전 날이더라. 결혼 생활은 어떠셔?"

"...... 이혼했어."


"아.... 몰랐어. 그랬구나."

"너 만큼 날 참아주는 사람이 없더라."


"그렇지, 나 같은 여자가 흔치 않지. 그러게 있을 때 잘 하지 그랬어."

"참, 좀 있다가 곽기장오면 나 이혼한 거 모른 척해줄래? 주변 사람들은 아직 몰라."


"아 그래...... 알았어.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었구나? 많이 힘들겠다."

"한 일 년...... 됐어."


가족들조차 모르고 있다는 노안의 이혼,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물음에 주변 사람들에게 알릴 준비가 안되어 있단다. 자신조차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겠냐 했다. 이혼의 이유는 성격차이. 하긴 그대의 빈정대는 말투와 까칠한 성격을 누가 받아내랴. 아들 만 셋 둔 집안의 무뚝뚝함과, 평생을 남편과 아들 셋, 시어머니의 뒷바라지로 희생한 어머니 같은 여자를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찾기가 쉽겠는가. 조선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는 한 미션 임파서블이란 말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다가 이혼 도장을 받는 조건으로 빈손으로 나왔단다. 월세방에 조금씩 혼자 살림을 채워가며 산지 일 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즈음 거제도커플(첫사랑 4회 참고)이 등장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다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추억을 안주삼아 기울이는 술잔은 맛났다. 지난 시절 서로의 지질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그땐 왜 그랬냐? 넌 바보였어 대놓고 이야기하니 속이 시원 해지는 듯도 했다. 그렇게 오랜만의 재회는 시원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우린 오랜 친구처럼 가끔 만나 수다를 떨었다. 나는 더 이상 23살의 등신 김주영이 아니었고, 그도 더 이상 30살의 개새끼 노안은 아니었다. 5년의 시간이 우리를 다른 자리에서 서로 마주 보게 해 준 것이었을까? 지난 시간의 미움보다 추억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노안은 엄마의 죽음과 스토커의 시달림으로 힘들었던 시간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줬다. 그러나 노안은 나와는 다른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스토커가 내 가방을 날치기당했던 날, 두려움에 벌벌 떨며 강남의 한 건물 안에 숨어있는 나를 노안이 데리러 왔다. 안심이 되자 허기가 밀려왔고, 우린 집 앞의 감자탕 집으로 들어갔다. 


"주영아.... 내가 많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우리 다시 만나지 않을래?"

"뭐?"


"너랑 헤어지고, 결혼해 살면서 와이프랑 싸울 때마다 네 생각이 많이 났어. 너 기억나니? 나 아파서 고열로 시달릴 때, 네 다리 베고 잠들었던 밤 말이야. 열에 시달리다가 겨우 잠이 든 나를 깨울 수 없어서 벽이 멀어 등을 기대지도 못하고 밤을 새웠던 네 얼굴이 자꾸 떠올랐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네 눈동자가 자꾸 생각나더라. 그때였던 거 같아. 네가 날 정말 사랑하는구나 느꼈던 거."

"......."


"나도 너 많이 사랑했었어. 그런데 왜 그 말이 그렇게 나오지 않았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너랑 헤어지고 처음에는 너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어. 나만 바라보는 네가 갑갑했었나 봐. 그리고...... 널 늘 어리다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더라. 한 참이 지나서야 알았어.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거. 그런데 그땐 연락을 할 수 없었어. 동문회 주소록이 새로 나오지 않았더라면, 메일을 보낼 수도 전화를 걸 수도 없었겠지."

"......"


이 맛있는 감자탕을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낼 판이었다. 아 이 길고 힘든 하루에 이런 난데없는 고백이라니. 당연히 대답은 "노"였지만 너무 배가 고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 건 나만 아는 진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또박또박 내 대답을 시작했다. 


"오빠, 먼저 답부터 하자면 이건 아닌 거 같아. 오빠가 왜 나를 다시 만나고 싶은 걸까? 계속 나를 사랑해왔다고? 그건 아닐 거라 생각해. 아마도 오빠가 아는 나는 5년 전의 나겠지. 오빠만 바라보고, 오빠가 이 세상의 전부였던 나. 그런데 그 때로부터 5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나는 변했어. 오빠가 만약 지난날의 나를 떠올려 다시 만나고 싶다면, 우린 또 헤어지게 될 거야.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아니고, 오빠는 나에게 그 시절의 의미가 아니니까. 만약에 우리가 앞으로도 친구처럼 만나다가 달라진 모습마저도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그때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미안해."


결국 감자탕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리를 떴다. 나의 대답에 어색해진 분위기 탓이었다. 쌩 사라진 노안은 그 날부터 연락이 뚝 끊겼다. 스토커에 시달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헤어졌던 남자 친구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고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며 노안과의 재회는 그렇게 잊혀 갔다. 




그리고 3년 후,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여보세요?"

"나야."


"나? 네가 누군데?"

"야 내 목소리 또 까먹었어?"


"어머, 노안오빠? 그눔의 나야 좀 안 하면 안 되겠냐?"

"하하, 잘 지냈어?"


버스 제일 뒷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들과 조금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나른했던 오후, 수년만에 걸려온 노안의 전화는 반갑기도, 놀랍기도 했다. 


"나야 뭐 잘 지냈지. 오랜만이네?"

"내일 뭐하냐? 나 내일 결혼한다."


"어머 정말? 결혼을 또 해? 재주도 좋다. 남들은 한 번도 못해서 난리더만. 한 번 밖에 못 사는 인생 결혼은 두 번 정도는 해줘야 결혼 좀 해봤네 하는 거 아니겠냐?"

"그렇지 니가 좀 뭘 아는구나~ 오빠 결혼식에 와야지?"


"근데 어째. 나 국가고시를 봐야 해서 못 가겠는 걸?"

"국가고시? 너 공무원 시험 보냐?"


"아니 운전면허 실기시험, 정말 중요한 국가 고시지."

"야~ 그깟 운전면허 시험 때문에 이 오빠 결혼식에 못 온다는 거냐? 내가 너한테 그 정도밖에 안돼?"


"어. 딱 그 정도야. 아놔~ 오빠 결혼식이면 과 선배들이랑 오빠 친구들 다 올 텐데 내가 어떻게 가? 우리가 좀 유명했어야지. 진심 내가 가길 바래? 간다 치자, 사람들이 날 제정신으로 보겠어? 왜 이래~ 알만한 사람이. 미안하다 내가 너무 제정신이라 갈 수가 없다."

"야 너 어디 학원 다녔냐? 말을 왜 이렇게 잘해? 깜짝 놀랐네. 알았다 알았어. 그럼 나 신혼여행 다녀오고 나서 한 번 보자. 할 이야기가 있어."


"엥? 왜? 그렇게라도 나에게 축의금이 받고 싶은 건 아니지?"

"얘가 점점, 아니다. 그럼 다녀와서 연락할게."


"어 그래. 두 번째 결혼 축하해. "

"그래 너도 운전면허 시험 꼭 붙어라!"


첫사랑의 두 번째 결혼이라. 기분이 묘했다. 한 번은 우연히 두 번째는 본인의 입으로, 두 번 결혼식을 모두 전날 알게 되는 것도 운명인가? 다음 날, 운전면허 실기 시험을 한 번에 붙었고, 노안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리고 한 2일 후 노안과 진짜 마지막 재회를 했다. 


저녁 7시 광흥창 역 앞에 서있는 내 앞에 차 한 대가 섰다. 창문을 내리며 장난스레 야~ 타! 를 외치는 노안을 만났다. 노안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차는 워커힐 호텔로 향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워커힐 호텔에 객실만 있는 아니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드링킹 하지 마시고."


그래 내가 미친년이지. 호텔 방향이라는 것만 보고 잔뜩 왜 해! 설마 그 정도로 미친놈이진 않을 거야. 차에서 내려 노안이 날 데리고 간 곳은 워커힐 호텔의 뷔페였다. 미리 예약까지 해뒀더라. 어리둥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나를 자리에 앉힌 노안이 입을 열었다.


"밥 한 번 사주고 싶었어. 너랑 연애할 때 맨날 떡볶이에 만두, 끽해봐야 피자 쪼가리 밖에 못 사줬던 게 마음에 늘 걸리더라. 장난 삼아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랍스터!라고 대답하던 네 목소리가 늘 마음에 박혔었어. 여기 뷔페 괜찮더라. 많이 먹어."

"...... 오래 살고 볼일이네.... "


그날 뭘 먹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자꾸 접시를 채워 내 앞에 놓아주던 노안의 모습만 선명하다. 밥을 먹는 내내 자신이 모질고 못되게 굴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자신을 배려해줬는지도, 얼마나 참아줬는지도 다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얼마만큼 자신을 사랑해줬는지도...... 그러니 그날 저녁은 아팠던 내 첫사랑에 대한 노안의 사과 같은 자리였다. 


지나간 시간들을 꺼내놓고 그때 왜 그랬어 묻기도 하고, 내가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도 하면서 지나간 사랑을 되짚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내가 선명히 기억하는 어떤 순간을 노안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노안이 기억하는 나의 행동이 내 기억 속엔 전혀 없기도 했다. 그리고 노안이 내가 떠날까 늘 전전긍긍했다는 것과, 과내 다른 동기생이 날 좋아하는 걸 알고 그 동기생과 내가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서 온갖 꼼수를 다 부렸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한 사랑이지만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을 노안은 잔뜩 가지고 있었다. 우린 서로 몰랐다. 서로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말이다. 상처를 받았던 사람도, 주었던 사람도 모두 똑같이 그 시간 속에서 아팠다는 걸 10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긴 저녁 식사 후 노안은 나를 현재의 시간 속으로 데려다주었다. 집 앞에서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며 이것이 정말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서로에게 안녕, 그래도 결국은 웃으며 안녕하며 끝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툴렀던 나의 사랑에 노안도 힘들었겠다 생각할 수 있게 된 것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정말 끝이 났다.


안녕, 첫사랑!



끝!




번외 이야기

노안은 내 20대를 관통하는 키워드 같은 존재였다. 사랑이 끝나고 나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모든 상황에 그때를 대입시키며 상대를 판단하려고 드는 통에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것이 늘 힘들었다. 아팠던 순간만큼이나 소중했던 순간들도 많았기에 나는 늘 그때를 곱씹으며 그리워하기도 했다. 힘들고 아픈 만큼 멀어져야 하는데 늘 그 어느 언저리쯤에서 머물며 스스로를 고문하기도 했다. 사랑, 누군가의 말처럼 내가 정말 그를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그를 사랑하는 나의 모습을 사랑했던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나를 대견했던 걸까? 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랑을 할 줄 아는 대단한 사람이야 스스로를 속였는지도 모른다. 그 길고 길었던 나의 첫사랑, 그래도 서로 웃으며 행복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마지막 장면으로 남았지만, 나는 가끔 내 사랑의 진위가 궁금하다. 아직도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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