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ke a movie #1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다. 세상에 진짜 이런 일이 있어? 싶은 일들이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일들이 정말 일어난다는 것. 어떤 영화냐고? 일단 이야기부터 들어보시라.
아침 7시, 빵집 문을 연다. 나보다 훨씬 이른 시간부터 빵을 만드느라 정신없는 제빵사 오빠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금세 매장 안 주방으로 향하는 작은 문을 타고 빵이 익어가는 냄새가 넘어오기 시작한다. 빵 냄새는 그 자체로 온기를 가졌다.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 고소함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랄까? 오븐을 갓 빠져나온 빵 냄새에 취하는 것도 잠시 가게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빵 냄새에 홀린 듯 하나 둘 걸어 들어오며 나에게도 비로소 분주한 아침이 시작된다.
계산대와 매대를 정신없이 오가며 아침 장사를 하다 보면 시간은 어느 사이 10시가 되어 있곤 했다. 사장이 출근하는 시간이다. 두 아기의 엄마인 사장이 출근해 빵 포장상태와 개수를 확인하고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그제야 제빵사들은 위층 사장 집으로 아침을 먹으러 자리를 떴다. 사장도 제빵사들도 자리를 비우는 10시부터 11시는 온전히 매장에 혼자 남게 되는 시간이다. 손님도 뜸해지는 시간이다. 보통 이 시간에는 평소에 손이 덜 가는 구석구석을 순번을 정해 치우곤 했다. 마지막으로 나온 빵을 포장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매일매일 누가 정해놓고 시키는 것도 아닌데 한가해질 즈음 10시가 되고, 사장이 내려오고, 제빵사들은 늦은 아침을 먹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딱 하나 달랐다. 막내 제빵사만 식사 후에 하던 제빵 용기 정리를 때를 걸러가며 하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매장 바닥에 낀 찌든 때를 바닥에 엎드린 채 낑낑대며 닦는데 열중했다.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기세 좋게 열리며 난 굉음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너 이름이 주영이 맞냐?"
"네? 네..."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다.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라 목소리를 들어본 기억도 없었다.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의 체구와 꽤 잘 어울렸다. 물론 그때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주영아 남자 친구 있냐?"
"네?...."
"뭐 있어도 상관없고, 내 마음에 들었으니까. 너 나랑 사귈래? 지금 바로 대답 안 해도 된다. 2주 줄게. 더 이상 기다리는 건 힘들고, 니가 싫다면 나도 다른 사람 찾아봐야 하지 않겠니? 그럼 2주 후."
대답을 건넬 사이도 없이 그는 문 뒤로 사라졌다. 뭔가 대단한 일이 휙 지나갔다.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긴 한 거야? 뭘 잘못들은 건가 싶기도 했다. 그 뒤로 2주 동안 그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였다. 말없이 일을 하고, 아침을 먹으러 사라졌다가 공장 정리를 하고 다음날 재료 준비가 끝나는 오후 2시면 조용히 퇴근했다. 중간 점검을 하거나 평소와 다른 눈길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 날 있었던 짧고 굵은 통보는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너무도 무덤덤한 그의 행동에 뭔가 고민하는 내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우습다 못해 잊었다. 시간이 가는 것도.
딱 2주가 되는 날이었나 보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다시 작은 문이 활짝, 또다시 요란하게 열렸다. 문 옆 계산대 옆에 서 있던 나는 역시나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작은 문 안으로 몸을 접듯이 숙여 매장으로 들어온 그가 물었다.
"생각해봤냐? 대답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는 순간 무슨 소린가 싶었다. 눈만 커다랗게 뜬 채 문 너머의 그를 올려다봤다. 순간 정적 1초 2초 3초....
"무소식이 희소식! 무언은 긍정. 알겠다. 너 4시 퇴근이지?"
"어어~ 저기요. 그게 아니라........"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는 사라져 버렸다.
"아니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무소식이 희소식이 여기다 붙일 말이야? 게다가 무언은 긍정은 듣도보도 못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겠지! 별~ 퇴근 시간은 왜 물어? 나도 좀 묻자! 너 몇 살이야? 이름은 뭐니? 와~! 살다 살다 별~ "
때를 놓친 말들을 혼자 남아 비 맞은 중마냥 웅얼댔다. 어마어마한 기세와 카리스마에 눌려 입이 안 떨어지기도 했다. 뭔가 말대꾸를 하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이랄까. 그는 키 190센티미터에 몸무게 108 킬로그램의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쌍꺼풀 없는 긴 눈매에 오뚝한 코, 꽉 다문 입술과 이마에 석 삼자로 그려진 주름이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유도를 시작, 대학도 유도 특기생으로 입학하고, 국가 대표 상비군으로 뽑히기까지 한 꽤 주목받는 신인 선수였단다. 그 와중에 한참 유행하던 길거리 농구대회에 참가해 불꽃 덩크 슟을 날리다가 허리를 크게 다치면서 의사로부터 유도를 계속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의 꿈만 꾸고 살다 더 이상 유도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았음은 말해 뭐하겠나. 쓰레기처럼 1~2년을 방황하다가 제빵을 알게 되고 자기 이름의 빵집이 갖고 싶어 내가 일하던 빵집에서 경험을 쌓는 중이었다.
그가 가진 묵직한 카리스마, 대답조차 제 타이밍에 할 수 없도록 만든 기세 덕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인지도 못한 채 시간은 지나 오후 4시가 됐다. 저녁 장사를 위해 내려온 사장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빵집 문을 나서는 순간 커다란 산이 앞을 막아 썼다.
"끝났지? 나오는 거 보니 끝났네. 타!"
산 같은 그의 뒤에는 모범택시 한 대가 서있었다.
"네? 저요?"
"그래 여기 너 밖에 더 있냐?"
"제가 왜요? 어!!!! "
역시나 내 대답 따위.. 그는 어느 사이 나를 달랑 들어 택시에 밀어 넣고 있었다. 190센티에 108킬로 만이 가능한 일이었지. 그가 타고 문이 닫혔다.
"기사님 곰달래 길이요."
"저기요, 아니 이게 무슨. 저 그쪽 사귈 마음 없거든요.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그럼 아까 말했어야지.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는 거 아니다."
"아니 말할 틈은 주셨고요?"
"싫어 이 두 글자 말할 시간은 충분했던 거 같은데, 일단 만나봐. 만나보고 아니면 그때 싫어해라."
"네? 저 그쪽 이름도 몰라요!! 뭘 알아야 친구를 하든가 연애를 하든가!"
"이름 이연우, 나이 너보다 3살 많아. 그쪽 그쪽 하지 말고."
말문이 턱 막혔다. 와 살다 살다 내가 이런 경험을 다 하는구나.
"아가씨, 청년 박력 있네. 한 번 만나봐요. 남자답고 좋구먼. 허허허!"
아, 기막혀.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까지 한 편일쎄. 세워 달란다고 설 차도 아니고. 그래 곰달래 길이 한국이긴 한 거냐? 일단 가자 가! 속으로 외치곤 입은 꾹 닫아 버렸다. 그래 어쩌자는 건지 보기나 하자하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택시가 섰고 그가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여기가 어디야.... 주춤주춤 대는 나를 또 안아 내리려는 그의 손을 탁 쳐냈다.
"여기가 어디예요?"
"우리 집"
헐! 뭐라고요? 지~입!!!!! 그가 오늘부터 사귀자 하고 데려간 곳이 처음으로 데려간 곳이 자신의 집이라니! 그것도 부모님이 같이 사는 집이라니!!!!!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