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블 Jul 01. 2021

내 술 사랑은 모계유전

막걸리


우리 엄마는 술을 꽤 좋아한다. 초반부터 너무 ‘폭탄 발언’을 해서 좀 그렇지만 정말이다.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독보적 애주가였고, 주변 아저씨나 내 또래와 비교해도 꽤 상위권이다. 지금은 몸이 아파 술을 입에도 대지 않지만, 가족들끼리 모여 술잔을 기울이면 여전히 술을 마시고 싶어서 입이 달짝거린다. 확실히 내 술사랑은 엄마 유전이다.


엄마는 무려 1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조기교육을 받은 몸이다. 50년 전 양조장에 외할아버지 심부름을 갔다가 막걸리 맛에 눈을 떴다고 한다. 막걸리의 짜릿한 첫 만남을 이야기하는 엄마의 표정이 한껏 신나있다.


그때는 꽤 많은 집에서 술을 만들어 먹던 때라 막걸리를 빚고 남은 누룩은 간식처럼 주워먹기도 했었다고도 한다. 전문가의 냄새가 난다. 엄마는 꽤 자주, 몰래 홀짝홀짝 마신 것 같다.


엄마는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 소주부터 맥주, 양주, 와인까지 일단 술이면 다 마신다. 그래도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술은 막걸리다. 역시 첫키스가 너무 날카로웠던 것 같다.


구 남친이자 현 남편인 엄마의 사위와 막걸리를 만드는 체험을 한 적이 있는데 엄마에게 며칠 맡긴 사이 막걸리는 맛도 못 보고 빈 통이 됐다. 딸들이 모두 나간 사이 내가 만든 술로 오랜만에 부부만의 시간을 가진 모양이다. 엄마는 위의 맑은 청주를, 아빠는 아래 묵직한 막걸리를 마셨다고 한다. 아빠도 공범이었다니.


단 맛이 덜해 꿀을 조금 타서 시원하게 마셨다고 디테일하게 설명해주는데 침이 꼴깍 넘어간다.


엄마는 어렸을 땐 꽤 자주 술을 마셨다고 했는데 세 딸을 키우느라 바빠서였는지 내가 무관심해서였는지 엄마가 거나하게 취한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다. 그저 가끔 아빠 옆에서 술동무가 되어주곤 했다. 내가 결혼한 뒤에는 때때로 사위와 술잔을 기울이며 해맑게 웃었다. 기분 좋은 에너지가 온몸으로 발산됐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요즘엔 입에도 대지 못한다. 병원에서 '절대 금주'라고 못을 박았다. 아빠는 의사 선생님 말을 매우 잘 듣는 환자 보호자여서 엄마가 맥주라도 한 입 마실라치면 재빠르게 인터셉트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뒤늦게 아쉬운 생각이 들곤 한다. 엄마와 제대로 된 술 한 번 마시지 못한 게 못내 섭섭하다. 20대의 난 왜 가족들을 제외한 주변인들만 챙겼는지 모르겠다. 내 친구, 직장 동료, 혹은 이보다 가벼운 사이의 사람이 가족보다 우선이었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는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다. 엄마가 힘들 때 술동무라도 되어주었으면 엄마가 조금은 덜 외로웠을 텐데. 엄마가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딸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속이 쓰리다.

매거진의 이전글 외할머니와 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