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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블 Aug 23. 2021

정육점표 우뭇가사리 무침

우뭇가사리


아파트 단지 앞 좁다란 골목이 있다. 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골목에는 우리가 자주 가던 슈퍼와 만화책방, 문방구가 있었다. 그 골목을 따라가다 세 번째 샛길로 들어가면 교회가 나오고, 샛길을 무시하고 계속 걸어나가면 엄마가 자주 가던 단골 정육점이 있다.


대형마트 개념이 없던 25년 전(벌써 그렇게 됐다고?)에는 필요한 식재료는 시장, 아니면 집앞 가게에서 사와야 했다. 엄마는 돼지고기를 주로 그 가게에서 샀다.


산적처럼 생긴 사장님은 육절기에 묵직한 고기 한 덩이를 넣고 버튼을 누른다. 육절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쓱, 쓱,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고기를 썰어낸다. 아저씨의 비주얼과 음산한 분위기, 머리가 울릴정도의 쇠 갈리는 소리는 정육점을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아, 우뭇가사리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정육점집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건 엄마가 우뭇가사리를 사러 종종 그 집에 들렀기 때문이다. 우뭇가사리에 시원한 육수와 새콤달콤한 양념장을 묶어 팔았는데 집에 돌아온 엄마가 오이와 양파, 당근을 채썰어 함께 섞기만 해도 여름 별미가 완성됐다. 후루룩 마시면 없던 입맛도 돌아온다.


중학생이 되어 옆동네로 이사를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삼겹살집은 문을 닫았다. 그 시기에 맞춰 우뭇가사리도 식탁에서 사라진 음식이 됐다.


우뭇가사리가 해초류라는 건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그동안 묵의 종류인줄 알았는데. 해초가 어떻게 묵이 되는지 신기해서 찾아보니 우뭇가사리가 옥수수수염을 말린 것 같이 생겼다. 털뭉치같은 베이지색 해초가 순백의 덩어리가 된다니.


만드는 과정이 복잡한 건 아니지만 역시 사먹는 게 낫겠다 싶어 우뭇가사리를 파는 곳을 찾았다. 내가 자주 가는 마트에도 없고, 동네 슈퍼에도 없고, 온라인몰에도 없다. 네이버에서 3000원하는 우뭇가사리를 찾긴했는데 배송료 3000원을 얹어 주문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결국 한동안 다시 잊고 살다가 최근 엄마와 시장을 돌아다니다 뜬금없이 우뭇가사리를 발견했다. 육수와 양념장에 오이 양파 당근까지 함께 묶은 게 3000원이다. 좋은 가격이다.


우뭇가사리를 보자 곧바로 양쪽 어금니 근처에서 침이 돈다. 엄마가 우뭇가사리를 보더니 "저거, 콩물에 넣어 먹어도 맛있어" 한다. 역시 나보다 '맛잘알'이다. 올 여름이 가기 전에 시원한 콩물에 얼음을 동동 띄운 우뭇가사리를 후루룩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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