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1월은 철수네도 영희네도 김장을 하는 게 연례행사다. 1년 동안 먹을 양은 아니더라도 그 해 겨울과 이듬해 봄까지 식탁에 오를 소중한 반찬이다.
우리집은 하루 두 끼를 집에서 먹었지만 양이 많지 않아서인지 엄마는 늘 다른 집보다 김장을 적게 한다고 했다. 그래도 막상 하는 사람 입장에서 20~30포기는 전혀 적지 않은 양이라 온 가족이 달라붙어도 오후 늦게 겨우 끝났다.
어렸을 때는 배추를 직접 절였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절인배추를 배달시키기 시작했다. 절인배추는 복불복이어서 왕왕 생배추나 다름없는 게 오기도 했다. 이때 엄마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그건 그거대로 담가버렸다. 다년간의 김장 경험으로 배추를 절이는 일이 가장 힘든데 일단 절인배추라는 이름으로 왔으니 ‘마인드 컨트롤’로 배추가 절여졌다고 믿고 김장을 하는 듯했다.
일단 식탁을 밀어내고 싱크대 앞에 김치를 담글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세팅한다. 내 일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무를 강판에 간다. 엄마가 고무장갑 낀 손을 내밀면 “그만”을 외칠 때까지 천일염과 고춧가루, 액젓을 붓는다. 마늘과 부추도 넣는다. 엄마의 느낌대로 양념을 한 데 섞어 배추소를 완성한다. 살짝 맛을 보고는 소금과 액젓을 더 넣는다. 그리고는 나에게 배추소를 건넨다. “음, 좋아”라는 말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배추 속을 켜켜이 채우는 작업은 단순노동 같지만 굉장한 테크닉이 필요하다. 소가 많지도 적지도 않게, 묻힌다는 느낌으로 채워야 한다. 잎 한 장 한 장을 들춰내 잊지 않고 넣어줘야 한다. 다 채운 다음에는 겉잎으로 예쁘게 감싸줘야 한다. 엄마가 보기에는 썩 마음에 들지 않은 결과물이었겠지만 별말 없이 통과다.
김치통이 적당히 채워졌다 싶으면 그때부터 내 역할은 바뀐다. 통이 찰 때마다 새로운 통을 갖다 주는 일이다. 김치가 다 담긴 통은 겉에 묻는 양념을 닦아낸 뒤 한켠에 쌓아둔다.
어느 정도 김치가 마무리되면 엄마는 나에게 뒷일을 맡기고 ‘가장 중요한’ 작업에 들어간다. 당연히 수육을 삶는 일이다. 수육을 먹기 위해 약간의 구박과 허리통증을 참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막 담근 김치에 수육을 얹어 먹는 건 언제 먹어도 설레는 조합이다.
상에 놓자마자 부랴부랴 달려들지만 많이 먹지도 못한다. 이미 간을 본답시고 소금에 절여진 배추를 너무 먹어서 늘 배가 벙벙했다. 짠맛에 물도 몇 컵 들이부은 뒤다. 그렇게 서너점 먹고 나면 남은 건 그날 고생한 엄마와 아빠의 술안주가 된다. 나는 크게 도와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제일 먼저 곯아떨어진다.
내 기억 속 가장 오래된 김장 작업은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인 것 같다. 허리춤까지 쌓인 절인배추를 엄마한테 하나씩 건네주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를 도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엄마 나이는 지금의 나만 했을까, 아니면 더 어렸을까.
요즘엔 김치는 다 사먹는 거라고, 그 시절엔 안 담가 먹는 게 이상한 거였다고 하지만 가끔씩 지금의 내 나이였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의 나는 김치를 담가볼 생각조차 없는데 그때의 엄마는 엄마의 엄마에게 배워서 시집을 온 걸까, 와서 배운 걸까.
연례행사였던 김장은 나의 대입준비와 대학생활, 연애활동, 직장생활로 나 혼자 격년으로, 다시 3년에 한번으로 바뀌어갔다. 그동안 엄마의 허리는 더 굽어가고 있었을 테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애써 외면했다.
이제 엄마가 만들어준 김치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됐다. 엄마의 손맛이 대단하진 않았지만 우리 가족만 아는, 시원하고 아삭한 그 맛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엄마의 김치냉장고에는 이제 내가 사다준 김치 한 통만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TV나 인터넷에서 돌아가신 엄마가 해준 마지막 김치가 아까워 썩을 때까지 냉장고에 보관해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여전히 울컥한다. 조금 과하게는 내 이야기 같기도 했다. 나는 남겨둘 김치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