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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이오 Jul 16. 2021

11일차, 도망쳐도 별일은 없을 거예요

시티픽션을 읽으며.

책을 언제나 근성 있게 읽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몸 상태가 잘 따라주지 않았다. 오늘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이끌면서 약 40분가량 책을 붙들고 있었다. 어제 읽다 만 <시티 픽션>을 마저 읽었는데, 40분이라는 시간이면 책 내의 단편소설 한 편은 더 읽었을 수 있던 시간이었다. 머리가 아파서였을까, 문장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리기만 하고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은 생각도 많고, 머리도 아팠던 날. 문장을 많이 끌어안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기만 했던 밤.


출처 : 한겨레출판 트위터 (https://twitter.com/hani_book/status/1278144548552585216?lang=de)




오늘의 챕터는 <별일은 없고요?> 라는 단편 소설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위에 사진에 간략히 정리되어있다. 주인공인 수연은 모종의 사건을 겪었다. 골머리를 썩이던 중 마침 아랫집 아저씨의 방화 사건으로 사직서를 내고 도망치듯이 엄마가 사는 곳으로 내려간다. 엄마와 지내는 단란한 일상, 엄마가 일하는 공장 내 외국인 직원들과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 이따금 수연과 엄마가 지내는 곳으로 내려오는 수연의 오랜 친구 K, 철물점에서 일하는 재섭과의 첫 만남 그리고 데이트. 이런 담백하고 평화롭지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수연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수연은 본인이 말하기를 재미없는 성격, 즉 무덤덤한 반응을 주로 한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간결하고 담담한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지가 않고 되려 무거운 느낌이 살짝 든다. 나는 화려하고 유려한 표현을 쓰는 문체도 좋아하지만, 이런 담백한 문체를 더 좋아하고, 가벼운 느낌보다는 무거운 느낌이 드는 글을 좋아한다. 천 마디의 번지르르한 말보다 때로는 어눌하지만 한 마디씩  눌러 담은 진심이 통하는 것처럼. 


소설을 읽으면서 지브리 영화들이 생각났다. 물론 소설은 지브리 영화처럼 화사하고 행복한 일상을 담아내진 않지만,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들을 그려내는 것이, 왜인지 모르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지브리 영화는 지금도 많이 유명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지브리 영화를 보면서 커와서 그런 걸까... 유독 더 그런 느낌이 강했다. 


별일은 없고요? 라는 말은 소설 내에서 재섭이 수연에게 보낸 문자의 내용이다. 둘은 우연히 각자의 일로 서울에 같이 올라간다. 수연은 엄마와 지내는 동안 그린 그림책의 출판을 하러, 재섭은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같이 올라간 김에 수연의 일이 끝나고 둘은 덕수궁 돌담길 밑을 같이 걷게 된다. 와플도 사 먹고, 내일 결혼하는 친구 커플도 이 길을 걸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수연은 먼저 다시 내려가는데 그때 재섭이 수연에게 보낸 문자의 일부 중 하나가 별일은 없고요? 라는 내용이다. 이 한 마디가 제목이 되었다는 건 이 말이 수연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는 소리가 아닐까. 


소설을 다 읽고 아쉽다고 느낀 건 처음인 것 같다. 재섭과의 이야기, K의 이야기, 수연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엿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도망쳐서 마주한 일들이 이런 소소한 행복이라면 우리는 도망쳐도 되지 않을까.




시간은 자정을 지나 2시를 넘겼고 엄마의 방엔 엄마와 방과 내가 있었는데 엄마의 코 고는 소리도 작고 방도 작고 나의 울음소리도 작은, 모든 것이 작은, 그런 밤이었다.
- 99p


잊고싶지만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잊고 싶지 않지만 잊히는, 그런 것들고 있겠지. 그렇지만 그게 누군가의 죽음이어도 되는 건지……. 나는 그건 좀 싫었다.
- 113p


나끼리 매일 싸우지 않고 내가 온전히 나 하나가 되길 빌었고 달의 뒷면처럼 영원히 볼 수 없을 것 같은 나 자신을 내가 끝내 찾아내길 빌었다.
- 125p


어떤 스님이 그러시는데 재미없게 사는 게 최고라고 하던데요.
- 1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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